불행하다는 말은 어찌보면 매우 객관적이다. 다시 말하여 불행함의 기준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 기준에 따른다는 말이다. 나는 지금 시력을 잃어 시각장애 1급의 장애인이 되었으며, 필자의 작은아이는 지적장애 2급의 장애를 갖고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가정은 매우 불행한 것이 분명하다. 뿐만아니라 필자의 목회는 일반적인 목회가 아닌 특수목회다. 그것도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다문화 이주민 목회다. 지금까지 23년 동안 이 사역을 하면서 좋은 일을 한다며 칭찬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 3D 목회이다. 이 사역이 과연 좋은 일이고 그렇게 보인다면 왜 많은 목회자들이 이 이주민 목회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이 하려하지 않는 목회이니 내게 기회가 주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실상 다문화 이주민 목회는 쉬운 사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갑과 을의 삶이 존재한다면 나는 언제나 을이다. 그것도 최악의 을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속한 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노회에서 필자는 전입순서에 따르면 가장 고참일 지도 모르겠다. 1987년 군목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지금의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니 이미 28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그 노회에 속해 있다. 물론 중간에 몇 년은 다른 노회에서 이주민 사역을 하기도 하였지만 어찌되었든 기수로나 경력으로나 필자는 고참 순위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노회는커녕 시찰회에서조차 무슨 자리를 한 번 맡아보라는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장애인이고 특수목회를 하는 필자에게 그런 배려가 있을 까닭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필자 자신이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언제나 모든 영역에서 열외이며, 비주류로 취급당하고,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은총(?)을 받고 있다. 특별한 대접이려니 이해하고 넘어 가려 하지만 때로는 씁쓸한 것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 또한 내 삶이니 말이다. 불쌍하다 못해 불행하게 보여지는 필자는 언제나 을이여야 하고 주류의 자리에는 언감생심 들어갈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 하나의 고백을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불행하게 보이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목사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필자 스스로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더 확실한 진실이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도 하려하지 않는 3D목회를 하므로 고난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이니 그것만으로도 필자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렇게 쓰임받는 삶을 산다는 것은 아무나 누리는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하고 있는 목회의 영역은 실로 무한하다. 역파송을 통한 세계선교와 일당백의 한국인 성도들이 모이는 나섬(나그네 섬김)교회, 세계에 단 하나뿐인 재한몽골학교, 은퇴자들이 모여 새로운 선교적 삶을 가꿔가는 뉴라이프 선교회, 이주민 나그네들을 섬기는 구제와 봉사, 기독교 방송 진행, 그리고 장신대 강의에 이르기까지 한명의 목회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의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분명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며, 내게 주어진 고난을 운명처럼 끌어안고 살아야하겠지만 그럼에도 행복하다. 이 고백은 진심이며 그래서 필자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보다 행복한 목회자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자랑하고픈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역을 필자와 나섬은 모두 감당하며 살아간다. 선교와 목회, 기독교 교육, 구제와 봉사, 대학에서의 강의까지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필자 같은 인생이 이렇게까지 쓰임받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이고 은혜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 모든 것에서 최초이고 그래서 최고일 수 있는 삶이라면 얼마든지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좋다. 얼마든지 약자로 살아도 괜찮다. 얼마든지 모든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소외의 삶을 살아도 좋다. 세상에서 얼마든지 불쌍하다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쳐져도 좋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 목회자로 쓰임 받는가이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행복하다. 그래서 오늘은 이 행복을 자랑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