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사람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감동적인 모습은 경계를 허물고 어느 누구든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점이다. 같은 유대인 내에서의 신분차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창녀와 세리를 구별하지 않고 친구로 삼으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 같은 주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 같은 아웃사이더까지 모두 예수의 소중한 친구이자 사역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미 경계를 허물고 하늘에서 세상으로 오셨으니 그런 삶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실 속에서 그의 삶은 파격이며 때로는 혁명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예수는 경계를 허무는 매우 위험한 존재로 보여지게 되었으리라. 인간이 가진 공고한 성을 허물고 때로는 그 문화와 정신까지 해체하려는 예수의 시도는 자못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예수를 따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든다면 경계를 허물고 해체하려는 끝없는 열정과 고난까지도 감수하려는 그의 삶 때문이다.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야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는 예수의 가르침도 그 맥락에서 읽어야 하리라. 옛 관념과 생각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이 경계를 허물라는 것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관으로 형성된 과거의 프레임이다.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으면 이단자가 되는 것처럼 여겼던 그 과거의 질서다. 때로는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관습이다.
나는 그 경계를 거부한다. 유목민들은 그 경계를 무시하고 초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계니 국경이니 하는 것을 조금도 고려할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의 이념이며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의 폭력적 명령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제 모든 학문분야는 물론이고 세속적인 비즈니스에서도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물며 목회와 선교를 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요구는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진정 우리는 경계를 허물고 세상과 미래를 보고 있는가? 경계를 허물기는커녕 성(城)안에서 어떻게 하면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탱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는 꼼수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경계는 의미 없는 선이다. 과거의 누군가에 의하여 그어진 선일뿐이다. 아직도 그 경계선을 절대 불변하는 가치나 진리로 여기는 자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이 새롭게 읽혀져야 한다.
나섬의 목회는 경계를 허무는 목회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기득권자들과 약자들, 배운 자와 못 배운자, 가진 자와 못가진자, 장애를 가진 자와 건강한 자 모두 우리 나섬에서는 하나이다. 우리 안에 차별은 없다. 이것이 나섬의 영성이다.
하나님 나라는 경계가 없는 나라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며 공평하다.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한 나라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차별과 편견이 없는 즉 경계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일 게다. 이것은 나섬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