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3장에 보면, 야곱이 에서와 만났을 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말한다. 설교를 준비하다 문득 이 말씀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우리 교인들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지 자신에게 묻는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와 용서의 장면에서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 이웃의 얼굴 속에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작은 자들이 우리의 이웃이라 하셨다. 이웃은 예수께서 만난 사람들이다. 예수는 작은 자가 곧 자신이라고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자들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광채가 나고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민낯은 어디로 사라졌을지 모를 만큼 분칠한 모습의 예수님을 그리는 것은 아닌가?
형의 상속권과 축복받을 권리를 시기하고 욕심내다가 하루아침에 장막을 떠난 야곱이 마침내 성공한 모습으로 형에게 다가온다. 형과 동생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을지 모른다. 분명 그들은 서로를 질시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욕망의 굴레가 야곱의 얼굴 속에 남아있고 동생의 거짓과 욕망에 대하여 분노하였을 에서의 모습이 떠오른다. 형을 만나야 한다는 동생의 두려움과 동생을 만나는 형의 긴장과 용서의 경계선에선 그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화해와 용서의 포옹을 할 수 있었을까? 마침내 극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울음의 미학이다. 울어야 한다.
그리고 야곱은 형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과 같다고 말한다. 형의 모습이 어떠했길래? 아니 동생 야곱의 눈이 무엇을 보았길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을까? 인간의 눈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눈은 내 마음이고 영적 태도다. 야곱이 에서를 하나님의 얼굴로 보았다면 그는 형의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는 오래전 형을 속여 가면서라도 욕망을 채우려 했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용서를 구하며 낮고 겸손한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랬을 때 형의 얼굴은 과연 하나님의 얼굴과 같았다. 형은 동생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주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생을 받아주겠다는 미소 띤 얼굴이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눈이 우리의 마음을 투영한다면 얼굴도 또한 우리의 생각과 내면의 본질을 보여준다.
나는 이웃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고 그들은 내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이 선교의 순간이며 변화의 지점이다. 그 순간이 역사를 한바탕 구원의 역사로 바꾸는 순간이다. 야곱의 눈과 에서의 얼굴에서 나는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배운다. 그들은 마음이 통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얼굴을 비비는 형제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동생이 그립다. 한편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하던 가인의 목소리도 들린다. 나는 누구인가? 가인인가 아니면 에서인가? 야곱처럼 내 형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인가?
우리 교회가 야곱과 에서가 만나는 곳이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서 수많은 야곱과 에서가 만나 서로 울며 사랑과 용서로 화해하길 바란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하는 공동체가 우리 교회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