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노마드경제 6 하나님도 못말리는 사람 > 노마드이야기

본문 바로가기


   
성서와 노마드경제 6 하나님도 못말리는 사람

하나님도 못말리는 사람

 

창세기 38 : 24 - 30 / 마태복음 1 : 3

 

다말은 기독교의 수치인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는 충격이다. 성서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말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시집간 여자가 소박맞아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시집의 사람으로 남겠다는 집념하나로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스토리는 도덕률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다. 어지간한 여자라면 자신의 인생이 이리도 박복하냐며 신세타령만으로 한평생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말은 어찌 이토록 상상을 불허하는 삶을 살았을까? 충격과 의문투성이인 다말의 인생이다. 너무나 경이롭고 기이하여 몇 번이나 성서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게 다말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도록 복잡하게 만들었던 장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할머니의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니 그녀의 삶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왜 하나님은 다말을 사용하셨을까? 다말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였을까? 인간의 생각과 도덕이라는 잣대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보셨던 것이리라.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당시의 수계결혼의 풍습에 따라 유다의 첫째 아들로부터 둘째 아들에 이르기까지 결혼을 하였지만 기구하게도 그녀의 남편은 모두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죽게 할 수는 없다는 유다의 판단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나 같아도 다말을 그녀의 친정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친정으로 쫓겨난 다말의 인생은 끝이 난 것인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다말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

 

성공에 대한 집념과 오기로 가득한 여자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여인의 한은 무섭고도 질긴 것이다. 실제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강하다는 것은 진실이다. 남자가 강하다는 것은 허구이며 여자가 더 강하고 담대하다.

성서 곳곳에서도 여성의 힘은 드러난다.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는 아브라함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야곱을 편애하는 리브가의 선택과 집중력, 그리고 남편인 야곱의 아이를 잉태하고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라헬의 집념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의 여인들은 실로 강하며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녀들 중 압권은 다말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이다. 그러나 며느리로서의 삶은 비루하다 못해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결혼한 남자는 모두 죽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아가라며 쫒아 버린다. 쫓겨나는 며느리의 심정은 한스러움이다. 여인에게 한은 무엇일까? 다말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자신으로부터 유다의 집안을 다시 회복시켜보겠다는 집념과 오기로 충만했다. 결국 그녀는 시아버지를 유혹하는 길섶의 창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다말은 개의치 않는다. 다말의 한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역사 속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는 며느리 다말을 생각해 보라.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의 소유자라는 것이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기와 집념의 삶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수없이 실패를 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 중 '물이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호피 인디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사례다. 끝까지 가야 성공한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다말에게서 배우는 교훈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는 것은 성공과 거리가 먼 선택이다. 야곱의 성공에 대한 열정과 인내를 보라.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얻어내는 장면은 특별하다. 7년간 일을 해서 얻은 아내가 장인의 속임수로 라헬이 아닌 레아임을 알았을 때, 라헬을 얻으려면 다시 7년을 일하라는 장인의 제안에 야곱은 순종한다. 사랑을 얻으려면 7년이 아니라 그 열배를 해서라도 쟁취하겠다는 신념이 결국 사랑하는 여자 라헬을 얻게 된 것이다. 믿음은 인내와 통한다. 믿음이 있다면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다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여자다. 그러나 단 한가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만은 결코 약하지 않다. 그녀는 올라서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 세상과 역사에자신의 이름을 기록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선택을 본 것이다. 그녀의 강한 집념을 보신 것이다. 이정도의 여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음을 아신 것이다. 조금은 도덕적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문제는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겠다는 한 여인의 한이며 집념이다. 오기가 통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문화일지도 모른다.

하나님도 못말리는 인생이 성공한다

 

다말의 이야기는 많은 신학적 논쟁거리를 던진다. 과연 성서 속에 이와같은 이야기가 왜 기록되었는지 그 의도를 묻는 사람이 많다. 모두들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본 이야기의 핵심은 구원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에 포함되기를 갈망하는 다말의 마음이 읽혀져야 한다.

구원사에 속한 삶이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다말의 선택은 어떤 경우에도 선하다. 이것을 도덕과 인간적인 의식으로 정죄할 수는 없다. 다말은 버려진 여인이다. 그녀의 선택은 옳고 그름의 상황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다말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포기하고 절망하며 살다가 그냥 죽어 갈 것인가? 아니면 운명에 맡길 수 없다며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라도 끝까지 아들을 낳아보겠다는 오기가 옳은가?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이미 선택의 범주를 넘어선 결단이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내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미 죽은 남편들은 내 죄가 아니다. 나는 무죄이며 다시 일어나야 한다.'

 

다말의 생각이었으리라. 왜 남편들의 죽음이 다말의 책임인가?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편견이다. 다말은 연약한 여자일 뿐 그녀가 남편들의 생명까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다.

모든 것이 선입관이다. 여자는 누구이며 연약한 과부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인간들의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나 계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진 윤리적인 신의 범주에 머물러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도덕보다 구원이 더 크다. 도덕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도덕 위에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다. 도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그분마저도 못말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도 못말리는 다말이 하나님을 이겼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던 열정을 보라. 하나님도 두 손을 들 때 우리 인생에 역사가 일어난다.

 

간절하고 절박하게

 

윤석금 웅진 코웨이 회장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절박함의 힘을 보았다. 그는 브리태니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재벌의 위치에 까지 오른 사람이다. 물론 지금은 많은 어려움으로 위기 가운데 있다. 하지만 분명 그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모델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이와 같은 인내와 신념의 기업가를 만날 수 있다. 때로 기업인은 아니지만 각 분야에서 탁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다말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사들을 볼 수도 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포기를 종용한다. 포기하고 절망하다가 죽어가라고 유혹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오기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내가 구로공단에서 실패하고 돌아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실패를 모르고 살았음으로 한 번의 실패에도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인간에 대한 실패였으니 그 절망감과 배신감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포기하고 싶었다. 정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했다. 인간이 죽음을 생각할 때에는 절망이라는 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칠 것 같은 배신감으로 진저리를 치며 살았던 시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절망에서 일어나니 오기가 생겼다. 두고 보자는 오기 같은 것이다. 일단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하나 밖에 없었음으로 선택이 없었다. 나는 결코 도덕을 믿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 단계를 설명하면서 윤리적 실존은 가장 낮은 단계라 했다. 그 다음이 심미적 실존이며 마지막 높은 단계의 실존이 종교적 실존이라 했다.

내가 다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의 파격 때문이다. 나는 파격을 좋아한다.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의 인생이어서 다말이 좋다. 나는 다말에게서 오기를 배웠다. 절망할 수 있었지만 다시 일어나는 그 파격의 결단이 좋았다. 나는 더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밤마다 간절함으로 몸서리를 떨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절박했으며 가슴속에서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다.

내가 다말이라면 나도 다말의 선택을 할 것만 같다. 그녀의 파격적인 결단과 신념의 삶이 성공의 길이었다.

 



hi
   


[04982]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로 1(광장동 401-17)
나섬공동체 대표전화 : 02-458-2981 사단법인 나섬공동체 대표자 유해근
COPYRIGHT © NASOM COMMUNIT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