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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와 게르솜 그리고 예수


-아들을 '나그네'라 부른 아버지, 아들을 '나그네'로 보내신 아버지 -

칭키스칸은 고통스러웠다. 사랑하는 아내가 적장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내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아내의 몸속에 숨쉬는 적장의 아이를 죽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고통은 칭키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오논강 가에서 매 사냥을 하던 중 메르키트족의 지도자 칠레두와 결혼하기 위하여 가는 허엘룬을 납치하여 결혼하였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테무진이다.  

예수게이는 아들 테무진이 9살 되었을 때에 옹기라트의 지도자 데이세첸의 딸과 약혼을 시켰다. 

예수게이가 어머니 허엘룬과 결혼한 것은 분명히 법과 관습에 위반되는 행동이었다. 메르키트족의 족장은 20년 동안 간직해온 수치를 일거에 보복하기 위해 테무진이 숨어살고 있던 지역을 급습하는데 다행히 테무진은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식량과 재산은 물론 그의 부인과 가족이 잡혀가게 되었다. 

그렇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저주는 저주를 낳고 전쟁은 전쟁을 낳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의 말씀이 이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지금 칭기스칸이 마주한 이 현실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타인의 아이를 그것도 적장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도저히 답이 없는 현실이다. 아내가 밉다. 아니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와 질투심이 차오른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적장의 아이를 임신하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죽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무엇이 두려워 이토록 절망적인 고통을 그에게 주는가? 칭기스칸의 생각은 한없이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를 겁탈하고 임신까지 시킨 그 적장의 비웃는 모습을 상상하니 치가 떨린다. 미치도록 고통스럽다.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칭기스칸은 매일 밤 술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것이 이토록 축복인지 그는 이제야 알았을 것이다. 잠은 아무런 고민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의 선물이다. 그는 매일 밤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술을 마셔야했다. 적장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어느 누구에게 상의할 수도 없다. 

어느덧 칭기스칸의 아내는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이는 축하받을 일인가 아니면 조롱받아야 할 일인가? 주변의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칭키스칸의 눈치를 보아야했다. 며칠인가 자신의 게르에서 나오지 않던 칭키스칸이 아이를 낳고 누워있는 아내의  게르에 찾아왔다. 옆에는 고요하게 엄마의 젖을 물고 잠이든 사내아이가 누워있다. 적장의 아이다. 죽이고 싶은 그놈의 아이다. 자신의 피가 아닌 가장 저주하고 싶은 적의 피를 가진 아이다. 말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수고했다고? 

'아이의 이름을 지어왔소. 이제 이 아이의 이름을 조치라고 부르겠소.' 

이렇게 해서 조치는 칭기스칸의 첫째 아들이 된 것이다. 조치? 그렇다 조치는 '나그네'라는 뜻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아들이 조치인 것이다. 수없이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그가 터득한 하나의 진실이다. 그것은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칭기스칸의 어머니도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 아내가 적장의 아이를 임신한 것은 바로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곧 자신의 책임이며 그렇다면 그는 비록 적장의 아이일지라도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여야했던 것이다. 그리고 칭기스칸은  아이의 이름을 조치라고 지었던 것이다. 나그네 조치이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의 가슴에 나그네라고 불러야했던 그 아픔을 사랑하고자 그는 아이의 이름까지 나그네 조치라고 불러야 했던 것이다.  아픔을 사랑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조치라고 지었던 것이다. 

조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는 나그네 의식을 생각했다. 나그네로서 살아야 한다는 철저한 노마드 의식이다.  노마드 의식으로 살아가고자 그는 아들을 조치라고 불렀다.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그는 나그네 의식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아들을 조치라고 불렀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질투와 시기가 조치라는 아이의 이름 속에 용광로처럼 녹아 있다. 노마드적 삶을 살아간다면 그렇게 세상의 아픔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조치는 잘 자랐고, 어느 날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중에 칭기스칸은 조치에게 그의 제국중 하나인 킵차크 칸국을 맡겼다. 


비록 적장의 아이이지만 그 아이를 사랑으로 품고자했던 칭키스칸의 포용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픔과 절망까지도 품고자했던 노마드 칭키스칸의 모습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는가? 죽이고 싶었을 만큼 분노가 있었지만 그 분노를 사랑으로 품어내는 저 가슴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지금까지 나그네들을 섬기고 선교한다고 하면서 나는 얼마나 그들을 미워했던 가?  조치를 부르면서 그는 하루에도 수없이 고통을 받아들인다.  

게르솜은 모세의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이다.(출2:22) 그 이름 역시 조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모세와 칭키스칸의 유사점이다. 왜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 지었을까? 모세의 두 번째 아들은 엘리에셀이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첫째 아들은 나그네일까? 

애급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던 모세다. 그는 출세가 보장되고 모든 여건이 완벽한 귀족이었다. 비록 히브리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미래는 확실한 것이었다. 그의 삶은 모두가 부러워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모세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그것도 믿었던 동족의 배신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 되었다. 궁궐에서 살던 모세가 어느 날 광야의 목동이 된 것이다. 인생이 그토록 부침이 심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정말 너무한 것이 아닌가? 궁전에서 광야로 추락한 인생이 되었던 것이다. 

모세는 십보라라는 미디안 족장의 딸과 결혼을 했다.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이방여인이다. 다문화 여성과의 결혼이다. 본인이 이주자가 되어 다문화 가정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낳은 첫째 아들이 게르솜이다. 스스로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이다. 

왜 모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을까? 왜 나그네라고 부르려고 했던 것인가? 


나그네의 삶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그네 의식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까지 나그네로 불러야했다. 나그네 게르솜이라 부르면서 그의 가슴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노마드적 삶에 대한 처절한 아픔과 결단을 간직하려했던 것이다.  

그래야 잊지 않는다. 잊어버리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배반이다. 아프지만 그 아픔 속에 숨겨진 하늘의 섭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 즉 나그네라 지었던 것이다. 그래야 그 나그네 의식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품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칭키스칸과 모세, 두 위대한 영웅은 똑같이 자신의 삶속에서 나그네 의식에 대한 고백이 있다. 노마드로 살고자했던 위대한 영웅들에게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아들의 이름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 부를 정도로 아픔까지도 사랑하고 그 나그네 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했던 처절한 고백이 있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도 애급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출22:21) 

이제야 모세의 이 말씀을 이해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나그네로서의 삶, 아니 자신의 아들까지 나그네라고 지어야했던 그 고백을 말이다.  

칭키스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나그네 의식 속에 숨어있는 포용력의 리더쉽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아들 조치에게서 찾아보면 어떨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나그네로 보내셔야했던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수가 나그네로 오셔야했던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도 나그네 의식이 투철하신 분이다. 노마드적 영성이 그분의 마음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인간에게 그래도 품어야 한다는 그 고통스러운 노마드적 마음을 품으신다. 죽이고 싶었을 만큼 미운 나 같은 죄인도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그 마음이다. 

아들을 나그네라 불러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아들을 나그네로 이 땅에 보내셔야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조치와 게르솜, 나그네라 불러야 했던 위대한 노마드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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