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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추억
저항의 추억

<1번 훈육생 이의 있습니다.>

"1번 훈육생 이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취급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반박과 저항은 거의 십분 동안 계속되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진장 놀라운 항변이다. 군법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명령을 어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반론에 대하여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군종목사 훈련을 받던 중 일어난 일이다.

그들은 우리를 혼합사관이라 불렀다. 군종목사와 군법사, 군신부는 물론이고, 육군사관학교 교관, 경리장교, 군의장교, 정훈장교 등등. 이러니 우리는 짬뽕사관이다. 온갖 소수병과의  장교 요원들이 훈련을 받던 중 훈련을 맡아 우리를 훈육하던 장교들이 우리의  이런 성격을 몰랐는지 처음부터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나는 모든 훈련생들 가운데 공교롭게도 교번이 1번이었다. 내 생전 1번 혹은 1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참이나 반항하던 내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훈련 중일 때 날 훈육하던 장교하나가 다가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 자리에 앉아!"

"야, 너 말 조심해. 나도 너 같은 동생이 있어!"

위엣 말은 그 훈육 장교가 내게 한말이고, 아랫말은 내가 그에게 한말이다. 겁도 없다. 그리고는 군목 훈련생들 모두를 훈련소 교회로 다 이동하도록 했었다. 한마디로 훈련소에서 데모를 한 셈이다. 그러니 훈련을 시키겠다고 하던 사람들 사이에 난리가 난 것이다. 도무지 있을 수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군이라는 조직은 참으로 요상하다. 군대가 계급 사회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계급이 갖는 힘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자식 같은 소대장에게 꼬박 존댓말을 한다. 부사관 계급을 단 어른이 아직 머리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소위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미안했다. 아무리 계급이 규정하는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계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중 목사와 군인이라는 상관관계는 보다 복잡하다. 아마도 군에서 유일하게 총을 지급받지 않는 병과가 있다면 군종병과일 것이다. 군목에게는 총이 지급되지 않는다. 하긴 목사가 총 갖고 논다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총 없는 군인이 정말 군인일까? 사실 군종목사의 존재는 신앙의 정신전력화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것이다. 신앙의 전력화라는 구호는 참으로 무섭다. 전쟁을 보다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사명으로 군종목사가 된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군대의 군종목사가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80년대는 좌절과 절망의 시대였다.
휘문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가 장신대 입학을 결심한 것은 고2때였다. 법대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지만 생각이 바뀐 것이다. 당시 신학대학교는 후기모집이었다. 그러니 전기시험을 보고 떨어지면 갈 수도 있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습지 않은가? 어떻게 신학대학이 이 시험 저 시험 다 떨어지고 할 수 없이 가는 마지막 선택이 된단 말인가?
그것은 내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꼭 장로회신학대학을 가고 싶었다. 정말 목사가 되고 싶었다. 더욱이 신학은 3년만 해서 되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높은 수준의 학문이 신학이다. 짧게 신학입문서나 몇 권 읽으면 되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인 내게 적어도 그런 정도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신학은 학부 때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소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비고사를 치르고 전기 원서를 써야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빨리 학교로 오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화가 많이 나계셨다. 나는 선생님이 왜 화가 나셨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기원서를 쓰지 않고 버티는 동안 원서접수 기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왜 전기를 쓰지 않았니?"
"저는 바로 신학대학에 가려고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갈 것입니다.""이 새끼 정말 미쳤어!"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호통을 치면서 하신 말씀이다.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쳐다본다. 정말 미친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창피하지 않았다. 욕을 먹어도 좋았다. 미친놈이라고  혼이 나도 좋았다. 나는 갈 길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다. 신학대학은 전기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고 소신을 갖고 가는 학교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할 즈음 우리나라는 대단히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981년도의 대한민국은 혁명의 계절이었다. 군부독재가 시작되고 대학마다 학생운동이 점점 고조되던 시절이었다. 1학년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지만 내겐 그 시절의 고민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신학대학의 분위기란 정말 숨 막히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내가 너무 조숙했었을까? 나는 매우 심각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그럴 즈음 군종목사 시험이 치뤄진 것이다. 군목시험에 합격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을지도 모른다.  
장로회신학대학을 다니는 내내 나를 지탱해 주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도망할 수 없도록 붙잡은 것은 바로 군목 후보생이라는 딱지 덕분이었다. 내게 군목이라는 줄은 애증의 교차점이었다. 내 삶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적인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데모를 하다가도 누군가 너는 군목후보생이니 뒤로 빠지라하면 나는 어김없이 뒤로 도망치듯 빠져야했다. 비겁한 군목후보생이다. 그러다 내 친한 친구 김문기 목사가-그도 역시 군목 후보생이었다.- 데모 주동자로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 당시 12명의 군목후보생 중 가장 먼저 날라간(?) 것이다. 그것도 데모 주동자로 찍혀서 끌려갔으니 대충이라도 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무진장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11명중에서 나는 가장 먼저 군목이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강제징집으로, 그리고 나는 가장 먼저 군목으로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시작된 것이다. 

1987년 6월은 왜 그리도 더웠던지... 나는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군목 훈련은 받고 있었다. 훈련소 한쪽에서는 데모 진압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식은 무척이나 가슴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극에 달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리 아버지 장로님도 광화문에 데모를 하러 가셨었다니 그 분위기는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군목 훈련 중이었다. 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여전히 내 삶의 편안을 위하여 그렇게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군목이라는 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 군대 목사의 한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세상과 담을 쌓고 나는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단 군목이 되기 위하여 역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내게 어느 날 반란의 명분이 주어졌다. 군종신부들과 군종 목사들 간의 훈련과정에서 형평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것에 항의하던 군목 후보생들을 훈련소 교관들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중 훈련소 훈육대장이 군목 후보생들을 야간에 얼차려를 주겠다고 협박했으니 그 반란의 명분이야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군에서 처음으로 저항하는 출발이 되었다. 그 후로 나의 훈련소 생활은 무척이나 고달팠다. 매일같이 훈련소 훈육장교들은 나를 문제아로 찍어 벌점을 부여했다. 일정한 벌점이 넘으면 강제 퇴교를 해야하는 원칙에 의하여 나를 사병으로 보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셨을까? 나는 높은 벌점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중위 계급장을 단 군목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다.

군목으로 임관하고 내가 맨 처음 부임한 곳은 참으로 놀라운 곳이다. 지금의 제4땅굴이 발견된 바로 그 부대의 군목이 된 것이다. 물론 땅굴이 발견되기 이전에 나는 그곳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이라는 곳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지의 땅에서 살아본 것은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게 큰 축복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곳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믿는다. 정말 사람이 살기엔 너무나도 열악한 곳이었다. 전방 최전선 철책에서 나는 분단의 현장을 목격하며 살았다. 때로는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초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비무장 지대를 처음 들어가던 날을 나는 너무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갈대밭 비무장 지대로 들어갔다. 지뢰밭이 양옆으로 즐비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군데군데 장승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지뢰사고로 목숨을 잃은 두 명의 병사를 위하여 장례예배를 집전해야하는 아픔도 겪었다.

1987년 12월 어느 초순이었다. 그날 나는 사단의 보안부대장으로부터 저녁을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보안부대란 지금의 기무부대이다. 보안사로 유명한 전두환 장군의 친위부대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그 무서운 부대이다. 육군 상사가 대령과 맞먹는 부대다. 육군 중사의 계급이면 육군 중령이 꼼짝 못하는 부대이다. 보안부대 병사는 웬만한 장교나 하사관과 맞먹는다는 부대이다. 그들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죽은 체하여야 하는 절대 권력을 가진 부대이다. 계급이 중요한 군인사회에서 보안부대만큼은 예외이다. 그들은 계급을 초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군목으로 재직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투고 싸웠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 보안부대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횡포와 독재에 대하여 저항하고 싶었다. 모든 군인들 위에 군림하는 그들의 횡포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선량한 군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들과 싸우고 싶었다.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이념에 대하여 나는 깐죽대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깐죽거림을 넘어 경멸하고도 싶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보안부대의 대장이 나를 불렀다. 그때가 바로 87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모든 군의 조직은 철저히 노태우 후보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군내 장교와 하사관 가족들은 여의도로 선거 운동을 하기위하여 매주일 교회대신 서울로 갔다.
교회는 텅텅 비고 여의도 광장에 모인 군중들 틈에서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노태우를 연호했다. 내가 시무하던 천봉부대 교인들은 한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매주일 서울 여의도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병들을 정신교육 하라는 공문도 내려왔다. 부대를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만큼 노태우 후보를 지지했는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졌다.
지휘관들은 전전긍긍하여야 했다. 내가 있던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조리함에 대하여, 그리고 비민주적인 선거에 대하여 나는 정말 좌절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고민을 했다. 서울로 가서 양심선언을 하고 자폭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죽음을 선택하고 양심에 따라 폭로하는 것이 내가 장신대에 다니는 동안 비겁한 군목후보생으로 머물렀던 시절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닐까? 라며 스스로 묻고 물었다.
역사는 누군가의 피와 희생을 먹고 산다는 지극히 운동권적인 논리가 나를 지배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대하여도 고민했다. 내가 목사가 된 까닭과 목적에 대하여도 생각을 했다.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를 상상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마치 죽음을 선택한 예수처럼 장렬한 죽음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최후의 날을 기다렸다. 때를 기다리는 독립투사의 마지막 날을 말이다. 마치 윤봉길이나 안중근처럼 나는 자신을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역사를 바꾸리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라는 오만이다. 
때를 기다리는 혁명가처럼 나는 준비를 했다. 군에서는 병사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강화했다. 그 정신교육의 교관이 바로 군목이다. 목사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면서 계속해서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바로 그럴 즈음에 사단의 보안부대장이 만나 저녁이나 먹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사단의 보안부대장이 연대의 일개 군목하고 무슨 식사인가? 나하고 그 사람이 만나야 할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나는 단기 군목이다. 군에 말뚝 박고 살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왜 보안부대장이 나를 부르는가? 혹시 내 속 마음이 그들의 정보망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점점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 날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처럼 보였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오늘 나는 곧바로 서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사단의 보안부대로 갈 것인가?

내 작은 포니 승용차에 시동을 걸었다. 마침 우리 부대 정보과장이던 김대운집사님과 작전과장이던 신점남 집사님이 저녁을 먹자고 나를 부른다.

"목사님, 오늘 개고기나 먹읍시다."
"집사님, 나는 오늘 저녁 사단 보안부대장하고 약속이 되어 있어요. 미안해요. 나중에 먹읍시다."

차를 몰고 부대를 나섰다. 저녁 6시쯤이다. 하늘은 오늘따라 조금 흐리다. 눈이 오려고 하는 것일까? 강원도 양구의 12월은 가슴이 저릴만큼 고요하다.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해는 지고, 날씨는 흐리다. 나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5분 후면 나는 서울과 사단의 보안부대 사이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과 상념들이 가득했지만 속은 평안했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다. 이렇게 죽어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거의 마음은 굳어졌다. 서울로 갈 것이다. 그래서 양심선언을 할 것이다. 군내에서 이렇게 선거를 조작하고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곧바로 헌병대로 끌려갈 것이고, 무진장 얻어맞고 기절할지도 모른다. 병신이 될 것이다. 어쩌면 감옥에서 몇 년 복역하는 경우도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남자가 태어나서 이정도는 되어야지...

정말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웃기는 것이다. 아마 내 동생도 이런 마음으로 데모를 하다가 붙잡혔을 것이다. 사실 내 동생 호식 집사는 운동권 출신이다. 전두환 대통령 방일 반대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 고생을 했다. 한 때 우리 집안은 쑥대밭 초상집이 된 일이 있었다. 한동안 형사들이 동생을 찾으러 우리 집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아마 우리 집안의 내력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는 포니 승용차가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서울과 사단의 보안부대 사이에서 갈팡질팡 상상력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중이다.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장렬한 죽음을 상상하면서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눈에는 힘이 들어갔고, 추운 겨울이지만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이 이럴까? 나는 오늘 사고를 친다. 나는 오늘 역사의 판을 바꿀 엄청난 사고를 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 자신을 체면 속으로 몰고 들어갔다. 깊은 꿈속에서 구름을 타고 가듯이 차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두워진 강원도 양구의 어느 시골길 언덕배기에서 쌍라이트를 켜고 차가 달려온다. 오랜만에 만나는 시골길의 자동차다. 그런데 쌍라이트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울고 있는 것일까? 죽으러 가는 소처럼 그 마지막 운명의 서러움에 우는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앞이 흐린 것인가?

쿵!

그제서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언가가 내 차 앞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사고였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사고였다. 그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를 치는 큰 사고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것 같았다. 숨도 쉬지 않고 쓰러진 채 너부러져 계셨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는 살아나셨고, 6주의 진단을 받고 춘천의 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혁명가가 아닌 목회자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셨다. 하나님은 나를 목회자로 사용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바로 보안부대장과의 저녁식사를 위하여 가던 중 일어난 교통사고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나의 의도와 고민은 일거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그러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해프닝이... 서울에 가서 양심선언을 하고 어쩌고 저쩌구.... 곧바로 나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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