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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님몽골5 바가반디 대통령과의 만남 그리고 문화원의 설립(1)

바가반디 대통령과의 만남 그리고 문화원의 설립

 

4: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목사님! 조금 전 우리 대통령하고 목사님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 대통령이 목사님을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떤 사람이라고 불러요. 우리 대통령이 목사님에게 큰 감동을 받았대요.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이 목사님인 걸 다 알고 있어요."

 

20012월 어느 날 나는 당시 지구촌나눔운동의 서경석 목사님과 김혜경 사무총장(후에 청와대 시민사회 비서관)과 함께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한 바가반디 당시 몽골 대통령을 하이야트 호텔에서 만났다. 바가반디 대통령은 마침 어느 일간지에 실린 몽골학교에 관한 기사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때 바가반디 대통령과 내가 나눈 대화는 그 당시 한국에 와 있는 몽골인 근로자들의 삶에 대한 것과 한창 진행 중이던 몽골 문화원 설립에 관한 것, 그리고 재한몽골학교와 몽골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것 등이었다. 흔히 국가 간 정상회담에서 처음 이야기의 물꼬를 틀 때 감성외교의 차원에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그러므로 바가반디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몽골학교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 또한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우리의 이야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이나 길어졌다. 많은 기자들이 우리의 대화를 녹화하거나 기사화하였다. 그것이 나중에 바가반디 대통령의 자국 기자회견 중에 자료화면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몽골로 돌아간 친구들이 자료화면 속의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 전화를 하였다. 전화인즉 몽골 대통령이 자국으로 돌아가 한국 방문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면서 첫 마디를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의 내용인즉 대통령이 한국에서 눈이 잘 안 보이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몽골인 근로자들을 돕고 있고, 몽골문화원을 세운다고 하였으며, 그 사람은 현재 한국에 있는 몽골 아이들을 위해 학교도 세워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이번에 그 어떤 사람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당시 몇 사람의 몽골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보고 한국으로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바가반디 대통령을 만난 것은 나섬의 몽골 사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바가반디 대통령은 1206년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이후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공식 방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방한은 한국과 몽골의 외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바가반디 대통령의 방한은 20011월 초순이었다. 나도 언론을 통해 몽골 대통령의 방한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 뉴스가 보도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서울시에서 나에게 몽골문화원 설립에 대하여 논의 하자는 연락을 하였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고건 시장께서 몽골문화원 설립을 긍정적으로 추진해 보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1990년 몽골은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서울시와 울란바토르시는 1995년 자매도시를 형성한다. 몽골은 1992년이 되어서야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기는 하지만 어째든 그 후로 우리와 몽골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만큼 북한과는 소원해 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과 몽골이 혈맹적 관계라면 우리와의 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것인 만큼 진정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북한과 더 가깝다. 그러던 몽골의 대통령이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몽골의 대통령의 방한에 대하여 내게 묻는 이들이 많았었다. 그 당시엔 내가 몽골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다만 몽골학교를 운영하고 몽골인 근로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었을 뿐임에도 사람들은 마치 내가 몽골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내게 물어왔다.

몽골문화원 설립에 대한 관심은 2000년부터 시작되었다. 1999년 몽골 울란바토르에 선교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한 그해 겨울, 국내에서는 서울에 재한몽골학교를 세우면서 나의 관심은 오직 몽골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외환위기로 인해 몽골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다시 한국으로 찾아오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가 된다. 외환위기를 조기에 졸업한 우리나라는 19995월 김대중 대통령의 몽골 방문을 기점으로 많은 몽골인들에게 비자 발급을 해주기 시작하였고 불과 일 년여 만에 약 두 배의 몽골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몽골 사람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몽골에 집중 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콩가루 같았던 몽골초원의 유목민들을 하나로 결집하고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그 영웅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과연 그의 리더십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유목민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강자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몽골의 힘은 다문화를 통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이미 추아라는 예일대학의 석학은 그녀의 책 '제국의 미래'에서 같은 주장을 한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그리고 지금의 팍스(Pax) 아메리카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강자들은 모든 민족과 문화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다. 몽골의 칭기즈칸은 열린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은 세대를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었다. 그래서 그는 적들조차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키려 했고, 때로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적장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모든 인간과 문화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통합하려 했다. 그의 통합의 리더십이 몽골 제국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몽골의 세계 정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불과 100년을 넘기지 못한 채 그들은 지금의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원나라는 불과 97년 만에 북원으로 돌아가 작은 유목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 후 몽골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졌다. 물론 몽골 초원의 유목민이 한반도에 내려오기도 했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중국의 청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여 지도력을 인정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몽골, 거란, 여진 같은 유목 이주민들이 들어와 우리와 공생 했다는 보고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들은 마이너리티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힘없는 약자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후 우리는 더 이상 몽골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지도에서 사라진 유목민이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몽골이 세계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몽골은 사회주의 혁명의 덕을 보고 국가를 재건한다. 그때가 1921711일이다. 지금은 나담축제를 하는 날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들이 중국의 지배로부터 혁명을 하고 독립을 쟁취한 날이다.

당시 소련 혁명군의 도움을 받아 몽골은 역사상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로 독립을 한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독립을 한다. 우리는 그 후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일제의 강점을 받고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의 냉전을 온몸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예외가 되었다. 북한은 몽골과 두 번째 수교국가가 되어 몽골과는 매우 깊은 외교적 관계를 형성한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몽골 외교관들 중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개 북한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였거나 혹은 김일성 대학 등에서 공부한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몽골을 만났다. 그것은 텔레비전에서다. 1976년이던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으로 금메달을 따는 순간 그 상대가 바로 몽골인 오이도프라는 선수였다. 나는 그때 몽골 사람을 텔레비전에서 처음 보았다. 그는 전형적인 몽골인이었다. 그것이 전부다. 냉전은 세상을 지배했고 같은 지구상에서도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처럼 그렇게 세상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함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냉전은 붕괴되어야했다.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 되면서 급기야 소련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는 일대의 사건이 이어진다. 동유럽은 도미노처럼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세상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을 받아들여야했다. 냉전은 과거의 틀이 되었고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국경과 민족의 경계가 허물어 진 것이다. 새로운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이해관계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고 자본과 기술과 노동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주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주민의 시대가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될 줄이야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몰랐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그런 시간과 마주하면서 진보한다. 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은총이었다.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모두 1955년생이라 한다. 그때는 세상이 컴퓨터라는 문명으로 도배되기 시작한 원년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컴퓨터는 성공의 조건이었다. 그들에게 컴퓨터가 없이 여전히 과거의 패러다임만이 존재하였다면 오늘의 그런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세속적인 가치이든 구원사적인 의미이든 그런 역사적 변화의 축에서부터 인간의 삶은 새롭게 쓰임 받는 존재로 바뀌어 간다. 그러므로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런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다문화와 세계화라는 트렌드를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목회적 영역이든 세속적 분야든 변화를 깨닫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우연히 서 있었다. 변화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문화와 세계화를 그렇게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다. 군목을 전역하던 1990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세상을 보고 싶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큰지를 눈으로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한 달 동안 유럽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저 북쪽의 노르웨이와 덴마크,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까지 잠도 자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가 세상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던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빛의 속도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 몽골과 우리나라는 수교를 한다. 역사적 만남이다. 13세기 몽골 제국 특히 원나라와 고려가 만나 거의 종속관계를 형성하고 살았던 그 100여 년의 시간은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다. 그때는 몽골이 갑이었고 우리가 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갑이고 그들은 을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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