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으로 누워있는 신 목사에게 “우리도 부활하자!” 했다. 고난 받는 이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간절하다. 특히 튀르키예 지진으로 엄청난 재난을 당한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 나섬의 선교지이기도 한 그곳에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남과 북의 분단으로 고통 받고 살아온 우리의 역사는 또 어떠한가? 이념의 진영논리 앞에 맥없이 주저앉은 우리 현대사의 아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이제는 우리 모두 부활하여야 한다. 회복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부터 선교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 깊은 곳까지 어느 것 하나 부활과 관계없는 것은 없다. 부활절을 앞두고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느끼며 새겨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교회의 부활이다. 복음으로의 부활이다. 우리 교회가 예수에게서 다시 부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은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다. 그 사건은 영속적이다. 부활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이며 교회의 능력이다. 믿는 자의 능력은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말한다.
나는 지금껏 부활의 능력으로 살았다. 고난의 시간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오직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예수의 부활이 내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악한 세력이 우리를 집어 삼킬 것 같은 힘으로 다가서도 우리는 그 세력 앞에 당당하며 정의를 포기할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가 악을 이긴다는 부활의 영적 의미를 믿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긴다. 반드시 하나님의 정의가 인간의 가벼운 술수나 욕망의 기술보다 우월하며 우리는 그것을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확인했다. 아무리 종교기술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 인간의 헛된 욕망을 무너뜨렸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주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며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이고 종교천재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월하심이다. 어떤 종교기술자도 어떤 성전주의자도 어떤 종교천재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힘을 자랑하지 못하였으니 부활이 그것을 한 번에 무너뜨린 것이다.
나는 이제 예수의 부활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날이 오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은 한낮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에 불과하며 불다가 멈출 늦바람이다.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힘들지만 버텨내야 한다. 결국 영성은 버티고 참아내고 기다리는 것이다. 영성은 믿고 살아내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