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어야 제대로 부활한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부활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활의 은총을 누리려면 잘 죽어야 하는데 잘 죽는다는 것이 실상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독재와 부정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권력자의 손자가 나타나 할아버지를 탄핵하는 이야기를 듣자니 하나님이 역사의 심판자이심을 확실히 알겠다. 역사는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며, 건강하게 사는 것 보다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는 고작 33년을 사셨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지막을 살고 가셨다. 그러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구원자가 되셨으니 그의 죽음이 달랐기 때문이며, 결국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부활하셨다. 우리 모두가 그의 부활을 기대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죽음이 갖는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잘 살았다는 말을 듣고 싶다면 잘 죽어야 한다. 잘 살아야 잘 죽는 것이 아니라 잘 죽어야 잘 산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먹고 부족함 없이 잘살았어도 잘 죽지 못하면 그의 최종 결론은 잘못 산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한다. 예수처럼 죽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부활을 바란다. 그러나 육신의 부활만이 부활이 아니다.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평가도 부활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기억도 부활한다. 그를 기념하거나 그를 영원히 저주하거나 죽은 자는 끝까지 역사의 심판 앞에 서야 한다. 그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추모예배 때 후손들은 죽은 자를 다시 소환한다. 죽은 자는 말을 못하지만 산 자들은 죽은 자를 놓고 말한다. 잘 사셨다고 아니면 기억조차 하기 싫은 분이라고... 어떤 말을 듣는가는 죽은 자의 몫이며, 죽은 자가 만든 열매다. 그가 뿌린 씨앗의 결과다.
잘 죽는다는 말은 잘 살았다는 말이며 온전한 부활을 말한다. 우리는 죽어서 부활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부활을 바라는 자들의 삶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가 부활할 수 있을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을 배워야 한다.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이들과 일제에 편들고 신사참배와 친일을 했던 자들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고 동일한 부활을 할 수 있을까? 나만 잘 먹고 잘살다가 죽어 육신의 부활을 이루면 족하다는 이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어찌 예수께서 바라시는 삶과 죽음이 그런 것이겠는가? 예수께서 바라시는 삶은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의 짐을 짊어진 자만이 진정한 부활의 영광도 함께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잘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영광의 부활을 얻는다. 십자가도 지지 않는 이가 부활만을 바란다면 도둑심보를 가진 것과 다름없다. 과연 그런 부활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지금은 십자가 지기에 좋은 세상이다. 얼마든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십자가다. 외면하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찾아볼 일이다. 그러면 잘 죽고 잘살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