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완전히 변화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최후를 목격하였을 때는 질겁하여 도망하던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며 모른다 했다. 그러던 제자들이었다. 비겁하고 의리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는 완전 새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니 이들은 아무도 못 말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박해를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을 침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사자밥이 되는 것도 불속에 던져지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활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는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바르게 바라보고 옳게 말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현실에 타협하고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의 믿음보다 우선될 수는 없다. 부활의 믿음은 모든 것을 단번에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묻는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로 작정한 우리는 세상에 타협하고 이기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때때로 불의를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정치를 믿음생활로 착각하며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이들에게 과연 부활의 믿음이 있는가?
나는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겠다. 때로 나도 무섭고 두려워 편안한 삶을 바라지만 그럼에도 내 속사람은 부활의 믿음이 가져다준 자유가 좋다 한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따르기로 하였다. 부활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힘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면 무엇이 무섭겠는가? 죽어도 다시 부활함을 믿기에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교회의 그릇된 권위와 위선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 살겠다. 부활을 속이는 것보다 부활로 자유한 삶을 살겠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므로 자유하다. 그 자유로 세상을 마주하며 자유롭게 목회하며 산다. 내게는 부활이 곧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