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잠을 못 잤다.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하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나 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다. 생각이 많아지니 잠이 오지 않는 거다. 주변에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하나마나한 말이다. 지난밤엔 이란 난민들 생각을 하다 잠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지난 8월 8일 주일 “전세계 페르시안과 함께 하는 예배”에 165명의 접속이 있었다. 그중 70명은 이란인들이었다. 호잣트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보통 한 가정에 많게는 7명에서 적게는 서 너 명이 함께 예배드렸을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날 예배에 접속한 이란인들은 족히 2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접속의 의미가 이렇게 크다.
이란 난민으로 자기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 같은 이들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예배였다. 소망을 잃어버린 이란의 처참한 현실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고향을 떠나 운 좋게 난민지위를 받아 유럽으로 떠난 이들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다. 더구나 나아지지 않는 코로나 상황은 그들의 고통을 배가 시키고 있다. 예배 가운데 들려오는 그들의 찬양소리는 간절했고 울부짖음 같은 탄식이 느껴졌다. 마치 출애굽의 상황에서 울부짖던 히브리 노예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빌론 강가로 끌려간 히브리 사람들의 처절한 기도소리 같기도 하였다. 이스탄불에 살고 있는 O형제의 찬양 중 '나의 하나님'이라는 한국어 가사는 왜 그렇게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귓전에서 맴도는 그 형제의 찬양 소리가 가슴에서 떠나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신앙의 힘을 믿는다.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다. 신앙이란 초현실의 세상을 믿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의 자리를 떠받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나눔으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덜어주고 미미하지만 소망의 끈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의 존재 이유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만한 일들을 찾아야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 사랑으로 실현되는 삶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말해왔던 ‘사회적 기업을 넘어 선교적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또다시 내 안에서 고개를 든다. 이제는 국제적인 선교적 기업을 만들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희망마저 잃어버린 이들에게 소망의 항구로서 사명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내가 너무 오버한 것일까?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난민 아이들에게 작게나마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니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장 그곳으로 떠나는 환상으로 밤새 비몽사몽으로 날밤을 새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눈가에 불편함이 느껴진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지난밤의 길고 긴 생각의 꼬리는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아침부터 또 생각이다.
이란 난민들과 함께 드린 예배는 나에게 또다시 선교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젠 좀 조용히 지내야겠다고 다짐했건만 내 안에서 용납하지를 않는다. 생각이 나를 잠재우지 않는다. 또 몸이 아프고 불편할 때까지 잠을 못 잘 테지만 며칠 아니 그 이상이라도 생각하고 생각해서 또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분명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