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했던가? 내 가슴에 새겨진 좌우명 같은 말이 다시 떠오른다. 왠지 무언가에 쫓기듯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날이면 나는 이 말을 곱씹어 본다. 몇 년 전 그리스의 아테네로 아프가니스탄 난민 사역을 갔을 때에 나는 일부러 피레아스 항구를 찾아갔었다. 피레아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처음 무대가 된 항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은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 섬의 비행장 이름이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일정도로 그는 그리스와 크레타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곳에 그의 무덤이 있고 묘비에는 자유인으로 살았던 한 인간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내가 처음 목사가 되겠다고 할 때부터, 목사가 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나는 자유하고 싶어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목사는 자유가 없다. 자유는커녕 목사는 종이며 노예다. 차라리 예수의 종이고 하나님 나라의 머슴이면 좋겠지만 내가 보기에 목사는 교회라는 제도와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머슴이다. 교회가 만든 전통과 목회라는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목사는 자유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어떤 관념에 구속된 노예다. 목회를 하기 시작하면서 목회자는 교인수와 헌금의 노예가 되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라는 굴레 속에서 한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누군가와 경쟁하는 교회는 자본주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며 그 경쟁에서 이겨야 생존할 수 있고 그것이 목사의 운명이다. 그래서 경쟁에서 이긴 목사는 조금 좋은 대우를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목사는 능력 없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그들에게 무슨 목사로서의 자존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은퇴할 날이 가까이 오면 얼마나 더 챙겨 나올까를 고민하는 목사의 민낯은 스스로를 비루하게 만드는 아픈 현실이 되었다.
목사는 자유가 없다. 자유는 목사직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결단을 하기 전까지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멀고 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유와 목사라는 두 가치를 모두 소유하고 싶었다. 자유로운 목사가 꿈이 된 것은 그 한계와 굴레에서조차도 찾고 싶고 만들고 싶었던 내 삶의 소망이었다. 나는 목사이지만 동시에 자유하고 싶어 제도권을 포기했다. 주류와 제도권에서의 성공은 자유와는 먼 것이니 당연하다. 나는 기존의 제도 속에서 살아갈 의지도 마음도 없었다. 자유를 위해서는 애급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가지 않는 광야가 자유의 땅이다. 광야는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느덧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섬이라는 공동체를 일구었고 그 안에 머물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자유 했다. 나만큼 자유로운 목사가 없을 만큼 나는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삶을 살았고 그런 목회를 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자유가 그리워진다. 언젠가부터 나는 자유를 잃은 새처럼 둥지 속에서 날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내안에 또 다른 성을 쌓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던 굴레 속에 익숙해진 것이다. 노마드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이주할 수 있기를 매일 성경을 읽듯 새기며 살았던 내가 나도 모르게 굴레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욕망의 굴레다. 오래가는 공동체를 말하는 순간 내게는 나섬이 굴레가 되었다.
물이 흐르듯 살자고 했는데, 바람처럼 머물지 않는 삶을 살자 했는데 물을 막고 바람을 붙잡으려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떠나보내고 흘려보내는 삶이 좋다. 언제까지나 나그네가 머물기를 바라지 말자. 나섬이라는 공동체가 끝까지 존속해야 한다고 억지로 머리를 굴리지도 말자. 그들이 가면 나도 가고 그들이 머물면 잠시 함께 머무는 삶 일뿐 이제는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자. 그래야 나도 죽는 날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자유 했노라!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