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는 바울의 선배이며 특별히 바울의 사역에 있어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 준 사도다. 바나바의 선택이 있었기에 바울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교회의 직제로 치자면 바나바는 담임목사 격이요 바울은 바나바를 보필하는 입장이라 해도 될 것이다. 바나바는 바울을 직접적으로 키워준 시니어 사도이다. 그런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는 대판 붙었다. 바나바의 조카뻘인 마가 요한의 처신을 놓고 두 사람 간에 이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은 마가를 더 이상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으나 바나바는 바울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그 일로 갈라서게 된다. 그 일이 그들 사이에 동역이라는 관계마저도 끝내는 결과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인간은 서로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얼마나 오묘하고 다양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동일한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을 낼 수 있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갈라서는 문제를 깊이 생각할 때가 되었다. 개혁하려는 사람과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긴장과 갈등을 더 이상 가져갈 필요가 없다. 모든 교회와 교인이 같은 입장을 가질 수 없다면 서로 다른 생각들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다툴 것이 아니라 갈라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습하려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면 굳이 함께 가야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차별금지법에 대하여도 그렇게 갈등할 것이 아니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정치적 목적으로 신앙을 이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하여 그 길을 따라가겠다는 사람과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차라리 갈라서서 각자의 관점에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권을 갖고 그 교권으로 교회를 지배하려는 세력과 그 교권에 대하여 저항하려는 세력이 더 이상 다툴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앙 양심대로 살면 될 일이다.
또 분열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분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함께 갈 수 없어서 이혼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갈라서는 것이 삶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분명히 갈라서는 이유를 달자. 개혁과 반(反)개혁으로 나누는 것이다. 개혁하지 못하겠다면 그 들은 그 길을 갈 것이고 개혁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 잊지는 말자. 역사 속에 누가 정의로웠는지 그리고 누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는 기록해 놓아야 한다. 역사마저 갈라놓을 수는 없다. 역사는 오직 하나의 평가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 누가 반(反)개혁에 앞장서 분열의 영을 키웠는지 가르쳐 줄 것이다.
결국 역사가 누가 정의로웠는지, 누가 기득권을 소유하고 지키려고 이렇게 교회를 분열시켜놓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길로 갈라서는 것이 좋겠다. 다만 갈 길을 가기에 앞서 먼저 나가라 하지는 말자. 나갈 사람은 나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다. 개혁을 위한 비상총회를 구성하는 길이든 기존의 반개혁적 방향으로 남든지 그것은 알아서 할 일이다. 한 교단에 두 총회가 있어도 좋다. 총회가 두 개로 나뉘어 각자의 선명성과 개혁성 그리고 공익성을 다투면 좋다. 그래서 누가 옳았는지 역사의 판단을 받아보자. 그래서 마지막 남은 자들이 역사의 승자로 기록되기를 기다려보자.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택을 했는지 주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