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부끄럽다. 내 속마음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며 구역질나는 것으로 가득하다. 예수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냄새난다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언제나 그랬다. 예쁜 얼굴로 포장하려는 못생긴 사람의 심리처럼 나는 나를 숨기고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제자인양 위선적이었고 때로는 자신만만하게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예수를 내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며 살겠노라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멋진 제자처럼 보이려고 했다. 베드로의 모습과 나는 너무도 흡사하다. 어쩌면 그때의 베드로와 나는 동일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의 신앙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었는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즈음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다. 나는 몇 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한 적이 있다. 베드로의 통곡 기념교회에서 나는 홀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가를 조용히 읊조린 적이 있다. 나와 동행하던 일행은 모두 지하에 있는 어떤 기념물을 보러 내려갔고 마침 발바닥을 다쳐 휠체어에 의지하며 다녔던 나는 홀로 그 예배당에 있었다. 그 예배당은 내 베이스톤의 음색을 맞춰주기라도 하듯 내 음성을 너무도 멋지게 울려 퍼지게 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 그 찬송을 부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려고 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왜 나는 예수를 믿고 신앙이라는 고고한 영역에서 나를 헌신하려 했는가? 목사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나는 그 목사직 제대로 수행하며 살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한 마음은 무엇이었는가? 그 찬송의 의미와 달리 우리는 높은 곳이 좋아 그곳을 향하여 내쳐 달려왔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려는 욕망의 삶을 살았다. 경쟁에서 이기고 많은 이들의 박수소리를 듣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착각 속에서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았다.
나는 왜 그곳에서 베드로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때에 나는 왜 그곳에서 갑자기 베드로와 나를 오버랩 시키며 고민했었을까? 아마도 베드로와 나는 너무도 담은 꼴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다니며 얻고자했던 것은 거룩한 십자가의 희생이나 고난이 아니었으며 인간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이기적 신앙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가져다줄 멋지고 성공적인 미래를 상상했을 뿐, 고난의 십자가와 무덤속의 죽음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의 배반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며 그의 예수에 대한 고백과 헌신에 대한 약속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의 예수는 베드로에게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고?'
나는 아내에게 위선적인 사랑을 고백한 적이 많다. 아내에게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했을 때에는 반드시 아내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느냐며 아내에게 내 사랑의 진정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강제로라도 아내에게서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주일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의 고백시간이면 내 옆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아내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하여 조용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내안에는 언제나 내 사랑의 고백이 위선이라는 어떤 자격지심이 있다. 그것은 늘 나를 괴롭히며 내 얄팍한 신앙을 꾸짖는 회초리 같은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얄팍하고 위선적이며 거짓된 사랑으로 인하여 힘들고 괴롭다. 그날 나는 베드로의 통곡기념교회에서 베드로가 가졌을 그 고통을 느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양을 부르며 나는 내 이기적 사랑과 그럼에도 나를 부르신 예수의 은총을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이 위선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