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법칙 중 소위 양질전환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 법칙은 극도의 양적 팽창이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질적인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물의 온도가 100도가 넘어야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임계점에 도달해야 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 법칙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와 헌신이 있어야 진보하고 변화할 수 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일종의 양질전환의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순교와 그들의 외침이 일정한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루터를 통하여 개혁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 한 사람의 천재성이 교회 개혁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중세교회와 교황의 교권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문제의식과 분노가 그날 그렇게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날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 루터는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오늘의 자유는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함성과 희생으로부터 얻어진 소중한 가치이며 문화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양질전환의 법칙이라는 매우 중요한 역사철학의 비밀을 온몸으로 경험하였으며 그것을 믿고 살아온 민족이다. 이제 다시 그 양질전환의 법칙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린다. 바로 교회가 질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다. 우리가 양적으로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질적 변화와 문화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교회는 우리 사회의 적폐라는 오명을 가진 집단으로 비난받고 있다. 이미 우리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가!
독재정권에 붙어 그들의 권력에 부역한 역사와 반공을 마치 절대 신앙으로 숭배하며 시대정신인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이 되었고, 이제는 사회와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가짜뉴스의 생산자가 되어 극우 파시즘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까지 온갖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세습을 합법화하고 그것을 용인함으로 공교회의 의미마저 스스로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하여 그런 교회와 교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비굴한 교회로 추락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비겁한가? 돈과 권력이 무서워서일 게다. 여기서 찍히면 안된다는 보호본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리 소리쳐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과 자괴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양에서 질로의 변화를 위하여 싸우고 순교하며 누군가는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교회가 오늘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한 두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가 있었음으로만 가능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에 이루어질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 끝장을 본다는 생각으로만 교회가 바뀌고 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점점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조금만 힘을 더하자. 그리고 용기를 내자. 가짜는 결코 진리를 이기지 못한다. 결국 진리가 승리하고 정의가 이긴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이전의 교회와 이후의 교회는 달라져야 한다. 카이로스는 임계점에 다다른 양질전환의 법칙을 실현하는 시간이다. 교회와 목회적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영성이 아닌 갈릴리 변방성의 영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 낮은 자와 함께 하는 영성이 우리를 살리는 영성이다. 다시 본질로 회귀하는 역사의 대전환을 이루어야 미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