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페르시아 난민사역을 하는 호잣트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2004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난민이 되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란계 한국인이다. 250 만 명에 육박하는 다문화 이주민들에 대한 뉴스가 지금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종교난민 지위를 얻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때였다. 처음부터 우리나라는 종교난민 지위를 주는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H가 종교난민지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난민이 되었고 한국 국적까지 얻어낸 사람이다. 무슬림 불법체류 이주노동자가 한국인이 되기까지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뿐만아니라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지금 터키에서 페르시아 난민을 돕는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으니 한사람이 얼마나 많은 경험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그를 처음만난 것은 강변역 인근 지하실에서 나그네를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1998년쯤이었을 것이다. 허름한 지하실에 찾아온 잘생기고 온화한 모습의 무슬림 청년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물론 자신은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이니 기독교를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H와의 첫 만남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만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게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페르시아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매주 토요일 몇 몇 이란 친구들과 페르시아 성경을 읽고 있는데 자신의 집에 한번 방문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 나는 침침한 눈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그의 집을 찾았다. 그의 집은 5호선 군자역 인근의 옥탑방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 옥탑방이 가까워지니 페르시아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페르시아 찬송의 곡조는 구슬픈 듯 무언가 깊은 영적 소망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명의 이란 친구들이 모여 찬송을 부르고 페르시아 성경을 읽는 모습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무슬림과 기독교는 언제나 적대적이라고 배웠던 내 선입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H, 내가 저녁을 살테니 무엇을 먹고 싶은지 말해 봐요."
"목사님, 삼겹살 사 주세요."
무슬림이 삼겹살을 사달란다. 무슬림이 결코 먹어서는 안 될 돼지고기를 사달라는 H의 말속에서 나는 그의 영혼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 챘다. 곧 그의 삶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 후 H는 상상할 수 없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례를 받았고, 우리 공동체 모임 중 이란팀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어느새 수십 명의 이란인들이 예배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매년 12월이면 우리 안에 속한 모든 이주민들이 모여 나섬축제 행사를 갖는다. 그 자리에서 H는 무대에 올라가 자신은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더이상 무슬림이 아니라고 1000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변화와 결단을 고백했다.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 대하여 그 자리에 참석한 이란인들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01년 9월 11일에 미국의 세계무역센터가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전세계가 경악했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즈음 미국에서는 백색가루의 독극물이 든 봉투들이 여기저기 소포로 보내지는 등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 공동체 앞에는 어느 날부터인가 이란대사관의 승용차가 길을 막고 교회로 들어가는 이란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교회로 들어가는 이란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있고 우리 공동체를 주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경찰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혹시 모르니 매일 무료급식 사업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백색테러를 운운하며 특별히 우리 공동체에는 무슬림들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H를 비롯하여 많은 무슬림들이 출입하는 우리 공동체는 요주의 장소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나를 걱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려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우리가 뿌린 씨앗은 결코 분노나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을 나눈 공동체에 누가 테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랑과 용서의 씨를 뿌렸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열매만을 거둘 것이라 믿었다.
2004년 H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난민지위를 얻었다.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12월 24일이다. 성탄선물로 난민지위를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난민지위를 잘 주지 않는 전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다. 현재 유럽의 경우는 약 38%의 난민지위를 주는 것에 비해 우리는 약 4%정도에 불과하다.
H가 종교난민지위를 얻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살던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해 종교난민지위를 달라고 하니 우리나라 법무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종교난민지위를 얻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H가 종교난민지위를 얻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종교난민을 얻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느니 H는 길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난민지위를 얻자 곧바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예멘 난민 오백여명이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다. 나 역시 이 일로 두 번이나 제주도를 방문하여 예멘난민들을 만나고 그들을 어떻게 처우하여야 하는지 많은 이들과 대화하고 논의한 적이 있다. 당시 한국교회는 무슬림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큰일 난다고 난리법석이었다. 결국 난민지위를 얻은 사람은 몇 명에 불과했고 일시 거주승낙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H가 난민지위를 얻고 신학공부를 하여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무슬림 난민들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주민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귀하게 영접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만 사는 세상이 아님에도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다. 더욱이 우리는 저출산과 초고령으로 인한 인구절벽의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무엇으로 우리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것인가? 과연 우리의 경제와 미래를 위하여 누가 수고하고 함께 할 것인가? 유일한 답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무슬림이라고, 이교도라고 거절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거절하는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예수라면 그들을 그렇게 밀어내고 쫒아버리셨을까?
H가 목사안수를 받은 것은 2013년 10월이었다.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에는 이미 시력을 다 잃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좀처럼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만은 꼭 그 자리에 가서 내가 H에게 목사안수를 하고 싶었다. H는 무릎을 꿇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H는 울고 있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라는 딱지가 붙은 무슬림으로 살았던 그가 예수를 만났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종교난민이 되었다. 그 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고,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이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 그가 목사가 되었다!
안수기도를 하는 내 손도 그의 어깨도 흔들렸다. 그의 눈에서 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도 H도 그 순간 그렇게 울고 있었다. 누가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살아왔는가? 그에게 안수를 하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다. 안수기도가 끝나고 H는 나를 안고 울었다. 한참이나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며 H와 나는 그 넓은 강대상 위에서 회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서로를 안고 펑펑 울었다.
2014년 6월 우리 공동체는 H 가족을 터키의 이스탄불로 역파송했다. 이란에서 넘어오는 수많은 난민들을 돕고 사역하기 위함이다. 1979년 이란에서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있었다. 그 후 40년 동안 이란은 미국과 적대적 국가로서 경제적 봉쇄를 당해야 했으며 결국 경제는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수많은 이란인들은 더 이상 이란에 머물 수 없게 되었으므로 탈출하게 되었고 그 길목에 터키가 있었다. 이란과 인접한 터키에 지금도 이란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현재 20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난민들이 터키 안에 머물면서 유럽으로 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페르시아 난민들을 위하여 우리는 H를 그곳에 보냈다. 나는 지금도 일 년에 한번 꼴로 터키에 간다. H의 사역지를 방문하고 그곳에 찾아온 이란인들을 돕기 위해서다. H는 난민들을 돕기 위하여 한국에 먼저 보내심을 받았으며 기독교인으로, 목사로,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한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역사와 세상을 바꾸었듯 H라는 한 사람의 수많은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된다. 그 한 사람으로 수많은 이들의 인생이 바뀌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그 한사람이 누구인가? 한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키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란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그것이 역사이며 세상이다. 나는 그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부르심 받았고 비록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H 같은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세상을 섬기고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눈을 잃어 삶에 수많은 멍 자국이 생기더라도 그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으니 나는 결코 헛된 삶을 살거나 손해 보는 인생을 살지 않았다.
현재 H의 이스탄불 사역은 상상초월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그는 수많은 페르시아 난민들이 모여드는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페르시아 요셉학교’를 세울 것이다. 요셉같은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그 민족과 백성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아이들을 키우는 사역을 하려고 한다. 호잣트의 간절한 바람이며 비전인 학교 세우는 일을 위하여 함께할 그 누구 없을까? 누가 그곳에 보내심을 받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