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으로 파송된 투하 선교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투하는 하노이 출신이지만 다낭 지역의 국제적인 선교캠프에서 동역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곳에 머물고 있다. 투하는 한국에 와서 서울 장신대 신대원과 에스라 성서연구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간 역파송 선교사다. 한국말을 능통하게 하는 투하를 보면 베트남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지난 1월에 있었던 베트남 역파송 선교지 탐방은 매우 의미있는 여정이었다. 투하는 역파송된 지 불과 8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다낭 지역의 선교센타에서 성경공부와 한국어교육, 통역일과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하게 살았다고 한다. 입술이 터지고 몸은 더 말라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투하는 여전히 살아있는 열정으로 충만했다.
나는 이번에 다낭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다름 아닌 하미마을이다. 그곳은 베트남 전쟁 때 한국 해병대가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작은 마을이다. 135명의 베트남 양민들이 학살당한 하미마을을 찾았을 때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가며 나는 5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났던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상상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1968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어간 양민들은 약 1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토록 엄청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찾아와 사과하고 보상하라며 악을 쓰고 덤벼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침묵하며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일본에게 당한 과거를 상기하며 일본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라고 반복해서 요구하는 그 행동을 그들에게 똑같이 대입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찾아간 하미마을은 고요했다. 비가 내리고 땅은 젖어 있었다. 한국에서 찾아올 일 없는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우리가 가던 날 마침 창원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 5명을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뜻밖의 조우였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나에게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 장로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했다는 이 장로님의 심경이 복잡한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구를 탓하기 위하여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저지른 과거에 대하여 사과하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미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의미 있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하미마을에서 다낭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나는 투하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녀에게 마이크를 주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해 달라 했다. 투하는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밖의 한마디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니 내가 먼저 운 것이 아니라 투하가 먼저 울었음으로 눈물이 났다. 투하는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곳까지 찾아와 주어 고맙다며 울었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국은 곧 기독교라는 등식이 성립 된다는 말을 하였다. 베트남에서 기독교 선교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미국과의 전쟁에서 고통 받았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의 트라우마 이면에 기독교가 있다면 과연 그들에게 기독교는 무엇인가?
선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를 다시 새기는 작업이어야 한다. 우리가 베트남에 선교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과거를 회개하고 사과하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사람들이 우리였다면 반드시 사과하고 화해를 요청하여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내민 손을 잡기 전에는 어떤 선교도 진정성을 가질 수 없다.
나는 투하가 그렇게 뜨겁게 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날 나는 투하가 비로소 우리를 용서했다고 생각한다. 투하의 말과 눈물에서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투하의 용서가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용서다. 비로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난 자유인처럼 두 손을 들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하미마을 방문은 내게 그리고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그런 자유와 해방을 위한 소중한 발걸음이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선교를 시작하여야 한다.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모든 과거는 잊고 새로운 비전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하려는 사역은 교육이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초기 선교사의 사역은 학교를 통해서였다.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강한 교회로 만든 힘이다. 교육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한국 남편과 이혼한 베트남 여성들 가운데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간다고 한다. 모계사회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은 제2의 라이따이한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베트남에 세우고자하는 학교는 ‘베트남 행복학교’다. 한국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간 베트남 여인들과 그 아이들에게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주고 싶다. 한국 축구를 가르쳐주는 축구교실도 열려고 한다. 마침 박항서 감독이 그 열풍의 중심에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나는 베트남 행복학교의 미래를 상상한다. 행복학교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다. 과거의 고통과 상처를 딛고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역파송 선교사 투하와 하미마을에서의 화해 그리고 베트남 행복학교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그날 하늘은 비를 내리고 있었지만 내 가슴은 활짝 개어 있었다. 하늘을 보았다. 괜히 눈물이 났지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소리를 혼자서 되뇌며 웃음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