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어떠했을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아의 행동은 매우 기이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화창하고 맑은 날에 왜 비가 내리냐며 그들은 모두 노아를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비는 내렸고 노아는 가족과 함께 자신이 만든 방주로 들어가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인류의 남은 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홍수 이후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아는 무슨 생각으로 방주를 만들었을까? 노아의 통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가 되었다. 교회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우리사회가 저출산과 초고령 사회로, 다문화 시대를 넘어 다민족 사회로 전환하는 이때에 교회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교회는 위기를 넘어 교회의 종말로 다가서고 있다. 이는 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결과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을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대형화된 교회는 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태생적 원죄라고 할 만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교회가 시장이 되었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교회가 시장의 논리를 답습하고 시장화 된 교회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기대는 쓰레기장에서 장미를 찾는 격이다.
당장 현실의 교회를 때려치우는 결단만이 그나마 교회를 연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쪼개고 쪼개어 작지만 강한 교회를 추구하여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진정성 있게 현실과 지역에서 추구하고 실현하여야 한다. 교회간의 부흥과 성장 경쟁을 거부하고 연대와 협력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대형교회를 비우고 허물어 작고 더 작은 교회로 전환하여야 한다. 나아가 그들의 자산을 농어촌과 세계선교를 위한 새로운 선교펀드로 전환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혁명적 결단이 필요하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교회에 드리는 헌금의 십분의 일을 한국교회 선교기금으로 공동 관리할 수 펀드를 조성하자. 나아가 목회자의 생활비 등 적어도 교단의 목회자 급여를 평등하고 차별이 없게 하는 것이다. 교회안의 불평등과 빈부의 양극화 해소를 위한 혁명적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선교와 교육 그리고 구제에 대하여 교회 간 협력을 해야 할 때다. 이를 통하여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을 하여야 한다. 과감하게 교회의 몸집을 줄이고 신학교를 구조 조정하여야 한다.
목사들의 이중직을 허락함은 물론이고 더 이상 목회자가 교회를 지배하는 구조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모든 교회의 재정을 통합 관리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이다. 돈으로 부자가 된 교회는 교회로서의 힘을 잃어버린다. 교회의 힘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돈을 거부할 수 있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앞서의 제안은 모두 허망한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위의 제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안다. 그럼에도 끝없이 제안하고 도전한다. 나섬은 교육과 선교를 위한 재단설립을 하려고 한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의 문제로부터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였다. 제안을 하기보다 우리가 먼저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보려했다. 교육과 선교를 위한 우리의 재단설립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도전하여 반드시 그 꿈을 이루려한다. 그것만이 나섬의 살 길이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모델이 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작지만 강한 공동체가 살아남는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심정으로 나섬은 교육과 선교를 위한 혁신적인 재단설립을 시작한다. 과연 모두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미래의 교회를 위하여 지금 당장 그 발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홍수가 시작되던 날 노아의 배 만든 목적을 이해하게 되었듯이 교회가 종말을 맞이할 때에야 그 의미를 알 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