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우상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죽은 금송아지를 혼동했던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히브리 백성과 아론은 모세를 기다리다가 그들만의 예배를 드렸다. 그 때에 그들이 만들어 예배하던 대상은 금송아지였다. 그들은 금송아지에게 절하며 그 금송아지를 야훼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였다. 우리가 부르고 예배하려는 이름이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우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금송아지였다면 이는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예배하고 헌금을 드리지만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껍데기의 신앙이요 이단 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사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회가 커지고 대형화되어 어느 순간부터 목회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면 그 교회와 교인들은 신앙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모시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 아닌 우상숭배일 뿐이다.
목회자의 등신상을 세워놓고 교인들이 목사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그렇게 했다는 어느 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는 우상과 신앙을 분별하여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든다. 절대 권력은 절대 망한다고 하는데 그 속설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스스로 자고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순간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은 바벨탑을 쌓듯이 예배당을 짓고 우상의 대상이 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함을 안다. 그것이 역사의 반복되는 교훈이다. 처음부터 이단이거나 우상이 되려는 사람은 없다. 이단과 우상숭배에 처음부터 빠지는 사람도 없다. 개구리가 달아오르는 냄비에서 수영을 하며 죽어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유혹과 우상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단과 우상숭배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주변에서 만류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깊은 수렁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즈음이 되면 그들은 돈과 육신 아니 삶의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속았음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알고 나면 늦어버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자기를 객관화하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세상이 비판하는 순간을 결코 헛되게 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소리 지르지 않으면 저 세상의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 하셨다. 돌들은 누구인가? 돌들이 소리 지르는 경우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이다. 더 머뭇거리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조심스럽게 자신을 객관화해 보아야 한다. 과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가? 인간인가 아니면 신이 되려는 금송아지인가를 물어야 한다. 모두가 빠져 나오라는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자기들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깊은 병에 든 것이다. 종교개혁의 계절이다. 개혁되어야 할 교회가 우상이 되어 있다.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저 위선의 껍데기만 두른 거짓 선지자들이 눈이 안 보이는 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