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도 선교의 현장을 돌아본 적이 있다. 남인도의 첸나이에서부터 중부의 방갈로와 델리 그리고 북인도 펀잡주의 찬디가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지역까지 돌아보았다. 그중 첸나이의 도마 선교지를 갔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인 도마 선교사가 인도의 첸나이에 들어와 선교하며 기도하던 곳에서부터 그가 순교한 곳을 돌아보면서 인도선교의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지를 알았다. 2000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쳐 인도에서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설적인 선교사 윌리암 테리로부터 40여 년 전 인도에 들어간 한국선교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이 인도를 복음화하기 위해 헌신해 온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도 선교의 열매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어찌된 일인지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통상 복음은 한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오히려 인도 사회의 계급구조를 견고하게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카스트 안의 최하위 계층인 달리트(Dalit) 즉 불가촉천민들에게만 복음이 스며들어가게 된 것이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약 3%라 한다. 그 소수의 기독교 인구 중 약70%는 불가촉천민들이다. 이런 이유로 인도에서 기독교인은 곧 천민을 의미하는 프레임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복음이 사회적 굴레에 갇힘으로 더 이상의 선교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복음이 역동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사회 문화적 벽을 허무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는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민계급을 허물면서 성장했다. 사회 문화적 계급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생명력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자, 부자와 가난한자 같은 구조적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복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하나 되는 것이 복음의 생명력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 힘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카스트는 존재하며 기독교는 오히려 상층부의 카스트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낮은 계급 안에 갇혀 버리는 한계를 드러냈다. 벽을 허물어야 함에도 기독교는 벽안에 갇혀 더 이상의 비상(飛上)이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인도 선교의 딜레마가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인도 선교는 이슬람 선교보다 더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마저 들게 한다.
지금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인도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인도를 새롭게 바라본다. 인도의 인구는 곧 중국을 추월할 것이며 경제력에 있어서도 중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세계적인 인터넷 최첨단 4차 혁명의 중심에는 인도의 뛰어난 기술자들이 있다. 미국의 실리콘 벨리는 물론이고 전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들에는 어김없이 인도 사람들이 즐비하다.
세계 곳곳으로 인도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펀잡주의 골든 템플을 다녀오면서 나는 인도의 힘이 바로 그런 공동체적 영성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크교의 본산인 골든 템플은 가히 상상이상의 충격을 내게 던져 주었다. 하루에도 수 만 명이 그곳을 찾아 그들만의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수 천 명이 함께 식사하고 잠을 자며 살아가는 공동체였다. 인도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이든 이주하게 되면 그곳에 먼저 들어간 이들이 나중에 오는 인도 동료들을 위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마련하고 돕기 시작한다. 성공한 인도인들은 모금한 돈을 골든 템플로 보내고 그렇게 세계의 모든 인도인들이 하나로 이어져 간다. 우리나라에도 포천 송우리에서 일하는 인도인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힌두교 사원이 있을 정도다. 그들은 인도인이라는 강한 민족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연대의식의 뿌리는 힌두교다. 그들은 힌두교의 나라라는 뜻의 힌두스탄을 말하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인도의 현 수상인 모디 총리는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임을 주장하며 더 강한 인도는 힌두교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힌두교 이외의 종교는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기독교 선교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선교사들에게는 비자가 나오지 않으며 기독교 선교사임이 드러나면 곧바로 추방을 당한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인도에서 추방되어 돌아오고 있다. 나는 근래에 추방된 선교사들을 만나면서 인도의 선교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도 선교의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한계가 지금의 인도 기독교의 모습이다. 인도 선교의 문이 점점 닫히고 있음은 물론 더 이상 기독교 선교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야기하고 있다. 인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우리는 인도를 포기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인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나는 오래전부터 역파송 선교만이 미래 선교의 희망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선교란 피선교지 스스로 감당하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들 내부의 벽과 장애를 허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역파송 선교 프로젝트는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고단하고 긴 터널을 지나 지금은 터키의 호잣트 선교사를 비롯하여 몽골의 보르마 목사, 베트남의 투하 그리고 인도의 판카즈까지 키워낼 수 있었다. 중간에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몽골과 이란과 터키 등의 훈련생들은 마지막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그만 두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실패의 경험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크게 쓰임 받고 있다. 나섬은 이미 그런 사례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으며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인도의 판카즈 목사는 인도 북부 펀잡의 주도인 찬디가르에서 온 이방인 나그네였다. 카스트의 브라만 계급인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어릴 적부터 개구쟁이로 자랐고 결국 20대 초반에 가족과 인도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만다. 급작스럽게 떠나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싸움꾼으로 대형 사고를 친 판카즈가 도망가기 위해 출국을 시도하던 중 가장 빨리 비자가 나온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브로커를 통하여 만들어진 비자를 들고 그는 우리나라 포천 송우리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이방인 나그네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싸움버릇은 한국에서도 여전했다. 인도인들의 조직 속에서 그는 우두머리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사건과 사고에 연루되었다. 마침내 인도인들끼리 폭력사건이 일어나고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인도 사람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에서 급기야 한 사람의 인도인이 살해를 당한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자리에 판카즈는 없었다. 판카즈는 그 시간 나섬 사람들과 함께 부산에서 국토순례를 하고 있었다. 후에 판카즈는 그 일이 자신의 삶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만큼 충격적이며 기이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에 연루될 수밖에 없던 싸움꾼 판카즈는 묘하게도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부산 금정산 꼭대기 청소년 수련원에서 열린 신앙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판카즈는 급속히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세례를 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한국인 아내 이혜정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지금 그의 슬하에는 세 명의 딸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모든 딸들이 아빠와 엄마를 닮아 예쁜데다 천재성이 있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제 판카즈를 인도로 역파송하려 한다. 그는 장로회신학대학을 9년이나 다녔다. 학부 4년과 신대원 3년 즉 7년에 마쳐야하지만 그는 9년을 다녀야 했다. 중간에 성경시험에 떨어지고 이런 저런 사유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신학교 수업과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냈음으로 그의 신앙은 빠르게 성숙해갔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기도와 말씀만으로 판단하고 살아가겠노라 고백하며 깊은 영적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인도는 그의 고향이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받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인간적인 모멸감과 좌절로 인하여 절망하고 실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고향인 인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판카즈와 인도 전역을 다녔다. 어디가 판카즈를 부르시는 곳인지를 함께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다. 우리는 남인도에서 북인도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하였다. 그리고는 급기야 그가 가야할 곳은 북인도 그의 고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에 히말라야의 눈꽃이라는 선다싱의 고향 예배당에서 그를 북인도로 보내기로 결단하고 눈물로 함께 기도를 했다. 선다싱이 기도했을 그곳에서 나와 판카즈 그리고 함께 한 일행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결단의 기도를 하였다.
판카즈를 역파송하여 인도로 보내는 일은 그저 한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 선교역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사건이다. 그는 브라만 출신의 이방인 나그네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들었으며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났으며 객관적으로 충분한 인격과 삶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적인 인생으로 변화되어 쓰임 받는다는 면에서 바울을 연상하게 한다.
특별히 역사적인 인도 선교의 한계와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등을 고려할 때에 판카즈의 역파송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판카즈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확신한다. 그는 위대한 선교사가 될 것이다.
그를 인도로 보내면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하나님께서 인도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실까를 상상하면 가슴이 설레고 기쁨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 판카즈가 결국 그 변화의 중심에서 쓰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나도 더불어 쓰임 받는 것에 감사하다. 인도는 정말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다.
나는 오래전부터 입버릇처럼 다른 사람이 하는 사역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었다. 그 말 씨앗이 된 것일까? 판카즈는 그런 나의 고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가 가는 앞길에 고통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을 즐기려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는 고난을 즐기며 죽는 날까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판카즈도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판카즈는 위대한 선교사로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