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우리는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회와 목사들조차도 정작 사랑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그 방법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나도 그렇다. 나아가 실상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을 제대로 받고 사는지도 궁금하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랑하며 사셨을까? 우리에게 사랑을 가장 소중한 삶의 태도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은 사랑의 본을 어떻게 보여주셨을까? 한마디로 주님의 사랑은 절제된 사랑이었다. 오병이어도 치유도 무작정 모든 이들을 상대로 하지 않으셨다. 일회적 혹은 한시적 기적으로 사랑을 베푸셨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구원은 당장 오늘 내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피상적 사랑이 아닌 깊고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살게 하는 것이다.
나그네를 목회하며 때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나누어 주고 싶어 다가가지만 그런 사랑을 경계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사랑하여야 그들에게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주님의 뜻을 전할 수 있을까? 다가서면 오히려 도망하려는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필요한지 생각한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엄청난 사랑과 긍휼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난다. 더 이상의 오병이어는 없다. 그리고 오히려 군중이 주님께 또 한 번의 기적을 요구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서 벗어나 홀로 광야로 가셨다. 군중들의 욕망으로 사랑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하여 말이다. 주님의 사랑은 냉정했고 단호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사랑은 무의미하다. 주님의 사랑의 의미를 자각하는 이들에게만 그 사랑이 가치가 있다.
우리 교회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다. 탈북자들을 비롯하여 이주민 나그네에게 주는 사랑은 귀하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주님의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받을 만한 마음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인간의 욕망으로 대하거나 그 사랑을 부담스럽게 여겨 도피하려는 이들에게까지 나누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만난 두 강도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보면 한 강도는 주님의 초청에 즉각 응답함으로 주님과 천국으로, 반면에 다른 강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함으로 구원의 자리에 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받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차이는 주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태도다. 하나님 나라 선교사역을 하다 보면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이들의 상반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