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의 남북 분단은 예루살렘 성전건축의 부정적 부메랑의 결과였다. 성전건축이라는 미명하에 고통의 피해자는 백성이었으며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정치인과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북 이스라엘은 호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선포하고 회개와 회복을 역설했지만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반면 남 유다는 이사야, 미가 같은 선지자들의 심판과 회개에 대한 말씀에 순종함으로 민족의 운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본질적으로 선지자의 역할은 시대의 부패와 타락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었으니 남 유다의 멸망이 몇 년 연장되었다고 해서 북 이스라엘보다 크게 나은 것은 아니었다.
목회자의 역할 중 중요한 것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이다. 선지자는 시대정신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권력자에게도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선지자는 한 시대에 그리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없었다. 때로 박해와 죽임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선지자가 필요하다. 특히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지적보다 더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선지자의 역할이다.
옛 선지자는 당시의 정치 권력자들에 대하여만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주의자들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제사장들과 성전주의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거짓인지를 무섭게 지적하고 분노했다. 그들의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아무리 화려하게 잘 지었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선포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루살렘성전 정화사건이 그 트리거가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이 성전인가를 놓고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이 나눈 대화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무엇이 교회인가? 끝없이 타락하고 우상숭배에 젖어있는 어두운 교회현실에 대하여 말할 사람이 없음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깝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타락하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선지자 엘리야가 있었다. 한사람이 850명이 넘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맞장을 뜨고 싸웠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에도 한 사람의 엘리야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엘리야, 이사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세례요한과 예수님 같은 선지자가 없다.
모두가 침묵한다. 침묵의 카르텔이다. 당장 자신의 삶과 목회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리다. 아니면 아예 그런 침묵의 카르텔 안에서 같은 부류로 남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침묵도 그 책임을 져야한다. 침묵도 죄이기 때문이다. 침묵함으로 동조하고 침묵함으로 한국교회의 몰락을 방조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비겁함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선지자는 권력과 돈으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카르텔을 만들어가려는 교회권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회가 망하면 정치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