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절 그간 연락을 하지 못한 선배와 친구 목사들에게 전화를 했다.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에서부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는 물음은 대동소이하다. 내 주변 많은 목회자들 중에는 은퇴 아닌 은퇴를 한 사람이 많다. 나이가 되어서 은퇴를 한 사람에서부터 목회를 하다가 여러 이유로 교회를 떠난 이들이다. 그나마 은퇴할 나이가 되어 교회를 떠난 경우는 나은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힘들게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면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나마 교회가 남은 삶을 책임지는 경우는 괜찮겠지만 대부분의 목회자의 삶은 그리 편하지가 않다.
경제적 문제에서부터 해결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한 경우가 많다. 특히 노년의 경제적 문제는 목회자들에게 심각하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심방하는 것이었기에 목사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목사의 노년은 비루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목사들의 마지막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교회를 떠난 이후에 교회가 목사를 책임져줄 수 없다면 스스로 찾고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 주변 선후배 목회자들 중 많은 이들의 삶이 만만치 않다. 아는 것이 교회요, 할 줄 아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일이 전부였으므로 그들은 여전히 교회라는 울타리를 서성거린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교회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감을 갖고 있다. 교회가 전부가 아닌 것을 이제야 안 것이다.
목사들에게 교회는 한시적 공동체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은퇴를 하고 떠나지만 어떤 이들은 중간에, 어떤 후배들은 교회 문턱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교회를 떠난다. 교회는 냉정하다. 교회는 목사들의 최후의 보루가 아니며 마지노선도 아니다. 교회는 그저 잠시 있다가 떠날 정거장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교회를 개척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다시 세상이며 결국 하나님 나라다.
문제는 교회를 떠나 쉬고 있는 목사들이다. 칠십에 은퇴를 하고서도 여전히 건재한 목사들이다. 오십대와 육십대 목사들은 더욱 심각하다. 쿠팡으로 일하러 가는 후배 목사가 있다. 야간에 대리운전도 한다. 택시 운전을 하는 선배 목사도 있다. 집에서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 목사들도 늘어간다. 한때는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 같이 호기로웠던 이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말도 하기 싫은지 전화를 해도 심드렁하다. 이제 나 같은 목사가 문제다. 눈이 안보이니 홀로 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한 목사가 문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내가 없으면 나는 그날이 죽는 날이다. 그러니 나 같은 이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고민스럽다. 하나님도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나를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데도 왜 이리 자신만만한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할 일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나섬의 역파송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터키와 인도, 몽골과 베트남, 우즈베키스탄에 이르기까지 내가 갈 수 있는 나라가 전 세계에 있다. 그곳에는 우리가 키우고 파송한 현지인 선교사들이 있다. 이들이 나에게는 힘이다. 남은 노년의 삶도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게 할 이들이 세계에 퍼져있다는 것이 내 자신감이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선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목사들에게는 최고의 복인 것이다. 이것이 나섬이 내게 준 노년의 선물이며 하늘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