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거나 타 지방에 갔을 때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다. 그렇게 얽힌 사람들은 매우 빨리 친밀감을 갖고 어울리며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이주민 목회를 오래하면서 이주민들의 삶 속에서도 그런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하노이 사람과 호치민 출신이 서로 다르다. 그들의 공동체는 고향에 따라 나뉘고 만남도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대부분이다. 조선족 공동체도 길림성 사람들과 흑룡강성 사람들이 다르다. 인도도 남쪽 사람들과 북쪽 펀잡 사람들의 문화가 다르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일까? 우리나라도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서로 나뉘는 것처럼 이주민들도 서로 친밀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 고향에 따라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루살렘 사람들과 갈릴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더욱 그런 차별이 심했던 모양이다. 어느 고향 어느 인종인가에 따라 우리는 서로를 친밀하게 혹은 경계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 사회의 분열을 넘어선 큰마음으로 인간을 품고 사랑하셨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을 나누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인간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순례자의 관점에서는 동향(同鄕)의 사람들이었다. 고향보다 본향이 더욱 중요함에도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라 하면서도 차별과 분열의 영에 사로잡혀 살 때가 많다.
나섬교회의 주일학교 아이들을 보면 여러 나라 아이들이 함께 모여 교회학교를 이루고 있다. 몽골과 베트남, 인도와 필리핀 그리고 한국 아이들까지 다양하다. 나는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느낀다.
고향보다 더 큰 바다는 본향이다. 고향에서 본향으로 우리의 관점과 친밀감의 가치를 바꾸어야 세상이 달라진다. 선교는 고향에서 본향이 같은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그네가 순례자가 되게 하는 선교적 삶에 답이 있다. 나그네는 고향을 묻지만 순례자는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고향보다 본향이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라 하면서 분열하려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목적이 아니다. 여전히 세상이 목적지인 사람들이다. 아직도 우리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하루빨리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