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아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길을 만들자 하면서 성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으며 꾸지람을 하는 것이 아닌가! 초심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 삶의 나침판 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초심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르게 하고 때로는 가감 없이 나를 깨우쳐주기도 한다. 이런 여자가 내 아내인 것이 참 감사하고 다행스럽다.
이 아침 내가 가려는 길을 돌아보고 다시 정리를 한다. 느보산에서 모세가 모압 광야를 돌아보며 40년의 광야생활을 회고했듯이 나 또한 왔던 길을 돌아본다. 요단강 너머 가나안을 바라보며 앞으로 갈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바라봤던 것처럼 나 역시 앞으로 갈 길을 바라본다.
나는 지난 30여년의 광야생활을 어떻게 살았을까? 무엇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때때로 들려오는 백성의 불평과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며 가나안에 들어갔던 모세처럼 우리의 사역이 지금에 이른 것은 기적이다. 나 홀로는 올 수 없는 엄청난 길이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없었다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앞으로 갈 길 또한 많이 힘들 것이다. 당장 요단을 건너야 하고 여리고성도 무너뜨려야 한다. 그곳에는 가나안의 민족들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극복해야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내가 가려는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인가? 다시 돌아보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본다. 내가 가려는 길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부르심의 본질인지를 돌아본다. 나섬이 가려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우리는 가장 먼저 동해에서 지중해까지 길을 만들려 한다. 분단된 한반도의 길을 잇고 만주와 몽골초원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넘어 튀르키예까지 잇는 길이다. 일명 '몽골 투르크 선교벨트'의 길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그 길 위에 몽골학교를 세웠고 몽골문화원을 만들었다. 몽골에는 평화캠프라는 이름으로 평화의 길을 만들고 있다. 평화의 길 위에 햇빛발전소와 같은 에너지 자립 모델을 만들어 평화경제공동체를 이루어갈 것이다. 아울러 중앙아시아를 품기 위하여 그 지역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그 지역에 현지인 선교사도 보냈다. 거기에 더 많은 열정을 보태야 한다. 이미 9년 전 튀르키예에도 선교사를 파송했고 일 년에 한 번씩은 튀르키예를 가려 애쓰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스탄불에 난민들을 위한 선교센터를 설립하는 꿈을 꾸고 난민 아이들을 위한 요셉학교도 작게 시작하였다.
이제껏 몽골학교를 더 좋은 학교로 만들기 위하여 쉼 없이 달려왔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몽골학교를 넘어선 더 멋진 학교를 만들고 싶다. 나섬 아시아청소년학교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뉴라이프 선교회 역시 우리가 가야할 길 위에 세워진 사역이다. 우리의 미래는 다문화와 초고령 사회로 이미 결정된 바와 다름없다. 여기에 마지막 인생의 길목을 지켜줄 든든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장애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아내와 함께 품게 된 오래된 비전이다.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힘들다. 그러나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고통이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선교와 평화, 교육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면 그 길을 마다하지 않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고 목적이라면 길 위의 삶은 그 자체로 복이다. 육신의 눈이 망가져도 그래서 행복하다. 꿈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더 열정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