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섬의 교우들 중 멀리서 찾아오는 분들이 여럿이다. 그 중 한분이 이 권사님이다. 내가 이 권사님을 처음 만난 곳은 충청북도의 생극이었다. 지금처럼 봄기운이 완연한 계절이었을 그날 생극이라는 곳은 아버지 장로님 생전에 여러 번 다니던 곳이었다. 내 아버지 장로님이 충청도 음성에 작은 집을 지으셔서 나는 종종 그 지역을 다녔고 생극도 몇 번 둘러보던 기억이 있다. 권사님의 집은 하필 왜 그곳이었을까?
말하기조차 아픈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권사님도 이제는 조금씩 치유되어가는 중이라 믿고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것은 권사님이 짊어질 삶의 무게이지만 동시에 그 고통의 삶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나누고 싶다.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권사님은 어떻게 그 모진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얼마 전 권사님이 나섬에 큰 아들 영건형제를 데리고 오셨다. 영건형제는 지적장애를 갖고 있고 현재 충청도 제천의 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언제나 부모님이 계신 집을 그리워하는 영건은 그날 마침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고 나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왔다. 나와 나섬을 위하여 매일 기도를 한다는 형제는 순수하고 천사같은 청년이다. 형제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 두 모습을 담고 있다. 언제나 영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눈물이 나다가도 행복하고 웃음이 나다가도 가슴이 찡하게 아프다.
권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미치도록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작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먼저 천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날 내가 처음 찾아갔던 생극의 작은 집은 작은아들이 묻힌 생극의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위한 곳이었다. 잘생기고 건강했던 작은아들을 먼저 보낸 권사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매일 생극의 언덕 위 작은아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권사님의 삶이란 잔인하리만치 슬프다. 게다가 큰 아들은 장애를 갖고 있다. 이보다 얼마나 더 가혹한 인생일 수 있을까?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들었을 권사님을 만난 그날 권사님은 된장찌개에 손수 뜯은 나물과 연밥으로 밥상을 차려 주셨다. 눈물이 났지만 밥은 먹어야 했다.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연밥에 된장찌개를 먹었다.
누가 이 슬픈 이야기의 연출자인가? 나는 그날 생각했다. 세상에는 희극도 비극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비극을 원한 바가 없다. 그럼에도 당사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누가 인생을 이토록 아픈 이야기로 연출했단 말인가? 나는 그날 내 삶을 반추하며 또한 권사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 권사님은 생극이 아닌 음성의 한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계시다. 매주 토요일 새벽이면 그곳에서부터 서울로 교회의 꽃꽂이를 위하여 부지런히 달려오는 권사님은 에너지가 충만한 신앙인이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할라치면 눈물부터 나오는 권사님의 삶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죽여 달라고 길거리에 드러누워 울며불며 소리를 친다 해도 감히 아무도 손가락질 할 수 없을 슬픔이 남아 있을 권사님은 오히려 웃는다. 이제는 눈물을 흘리기 보다 더 힘차게 웃고 남은 삶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겠노라 다짐한다. 나는 지금 권사님이 내 방에 꽂아주신 꽃 냄새를 맟으며 이 글을 쓴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를 생각하여 항상 향기가 짙은 꽃으로 장식하기 위해 애쓰는 권사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꽃 냄새를 맡으며 사무실에 들어설 때마다 감사하다고 전화를 해 드리고 싶다. 잘 살아주셔서 감사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더 존귀하게 살아내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슬픔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그릇일 수 있음을 증거하는 권사님이 되어달라고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