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교만이 아니다.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시 한 번 선교를 생각하고 바람직한 선교의 모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델이 여기 나섬의 역파송 선교임을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얼마 전 튀르키예를 다녀왔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역파송 선교사를 통한 무슬림 난민 선교사역의 현실과 전망이 매우 의미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이스탄불에서 5-6시간 떨어진 에쉬크쉐히르였다. 그곳은 신흥도시로 매우 깨끗하고 특히 젊은이들이 많은 곳이다. P 형제가 지도자로 사역을 하고 있는 그곳에 우리가 간 것은 화요일이었다. 매 주 주일에 예배와 모임을 갖고 있지만 그날은 특별히 서울에서 우리 일행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8시에 일부러 모인 것이다. 가정교회인 그곳에 우리가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를 가득 메운 신발들이었다. 누군가가 한 50켤레쯤 될 것 같다고 얘기를 한다. 이미 40명이 넘는 이란인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리더인 P 형제가 내게 진한 입맞춤으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란인들은 반가운 이들을 만나면 뽀뽀를 해주는데 남자가 남자에게 입맞춤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반갑게 맞이해주니 고맙기만 하다. 그의 아내인 마힌 자매와는 가벼운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다.
방안에 들어서니 이란 형제자매들이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한다. 너무도 반갑고 그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가. 쉬는 날도 아닌 평일에 일하고 피곤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했다.
그들 중에 시각장애인 부부가 있었는데 나를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 기다렸다고 한다. 그날 예배를 드리면서 5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식이 너무 은혜롭고 감격스러워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로 예배를 인도해야 했다. 그날 나는 베드로전서의 ‘산 소망이 되신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를 하며 은혜를 나누었다.
예배 후 P 형제와 마힌 자매가 손수 준비한 저녁식사를 나누며 교제를 나누는데 그 모두가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사람씩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와 기도를 해달라고 하여 함께 간 일행과 함께 형제자매들을 붙잡고 중보기도를 드렸다. 성도들마다 사진 찍기를 원하여 함께 사진도 찍었다. 늦은 시간 호텔에 들어와 온몸은 파김치였지만 그날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에스키쉐히르를 떠나 우리는 아시아 일곱 교회를 돌아보았다. 특히 바울사도가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던 드로아를 찾아가 보았다. 바울이 바닷길로 드나들 때마다 이용했다는 아소라는 항구도 다녀왔다. 바람이 불고 몹시도 힘이 들었지만 나는 그날이 참 좋았다.
우리가 이스탄불 나섬 페르시안교회(NPC)에 방문한 것은 토요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울었다. 그냥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눈물은 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마르지 않았다.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선교여행이었다. 주일을 앞둔 토요일 우리 일행과 NPC 성도들의 첫 번째 조우가 있었다. 이스탄불 NPC는 내가 튀르키예에 갈 때마다 방문하고 설교를 했던 곳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4년 여 오지 못한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 흘러갔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밋 형제와 페가 자매 부부뿐이었다.
토요일이었지만 30여명이 모였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내 몸은 점점 힘을 잃어 포도당 링거 주사를 맞아야 할 만큼 약해졌지만 힘을 다해 설교를 했다.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렀고 육신의 힘은 떨어져갔지만 내 영은 점점 맑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다. 주일 아침임에도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아침 일찍 배은경 선교사가 링거주사를 놓아주고 갔다. 주사를 맞으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나를 저지하고 막아서는 악의 세력을 이기고 싶었고 그것을 통하여 이란인들에게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온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리고 설교를 했다.
고통 받고 슬피 울며 애통해 하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들려주신 팔복의 말씀을 증거 했다. 그대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므로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다. 나는 또 눈물로 설교를 했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 오면 눈물이 난다. 눈이 아플 정도로 눈물이 흐른다.
다음날 저녁에는 소마와 레자 부부의 집을 심방했다. 일곱 가정이 모였다.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고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은혜의 간증을 나누었다. 모두 젊고 믿음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이란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그네가 되어 예수를 믿고 인생을 바꾼 당신들만이 이란을 복음화하고 민주화 하는데 주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모두가 ‘아멘!’으로 응답을 하였다. 그날 나는 정말 그들이 이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역파송의 선교는 이렇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역파송 선교사 H는 하나님이 구별하고 선택하신 사람이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한국에서 나섬에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난민이 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이스탄불까지 가게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다. 지금 이 순간 에스키쉐히르와 이스탄불에 이렇게 많은 이란 난민을 보내주신 것도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9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200명이 넘는 이란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모두가 무슬림들이요, 난민들이다. 그들은 전세계로 혹은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역파송 선교사로 살아간다. 선교의 흐름이 선순환 되고 있다. 역파송이 역파송을 낳는다. 누룩이 번지듯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간다. 그 속도가 놀랍고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왜 내가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하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것은 역파송의 열매를 바라보는 당사자만이 안다. 나만이 그 느낌을 안다. 그날 나는 이렇게 혼자 말했다. “선교는 이렇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