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요한이 계시록에 언급했던 아시아 일곱 교회를 돌아보았다.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에베소, 버가모, 그리고 서머나 등이다. 이미 여러 번 그곳을 다녀왔지만 이번 튀르키예 순례와 선교 여정에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시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교회는 없고 터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의 터에는 돌 더미만 있거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서머나 교회가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17세기에 폴리갑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일 뿐 서머나 교회 예전의 원형은 아니다. 칭찬받는 교회였던 빌라델피아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 교회도 흔적만 있을 뿐 원래 교회의 모습은 없다.
남은 것은 돌 더미들 뿐이다. 돌 더미만 남은 교회 터를 바라보면서 그때의 성도들은 교회의 모습이 훗날 이런 모습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도 예배당을 짓겠다고 헌금을 했을 것이고, 목회자쯤 되는 이들은 헌금을 모으느라 건축설교를 하였겠지, 누가 더 큰 교회를 짓느냐며 경쟁을 했을 것이고, 그것들을 자랑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나는 허무하게 무너진 교회 터를 찾아다니며 그것들을 확인하고 무엇이 본질인지를 묻는다. 한국교회의 예배당 짓기 경쟁구조에서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한다. 목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어떤 곳인지도 묻는다. 목회자들은 정직하게 답해야 하고 교인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깝다. 우리가 모이는 곳은 단지 예배당이며 성전이 아니고 콘크리트 돌 더미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일이다. 본질은 건물이 아니다. 본질은 사람 안에 있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다.
몽골학교가 좁다고 난리다. 올해 들어 입학하려는 아이들은 많아지고 학교시설은 제한되어 있으니 아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몽골정부에서도 대사관에서도 학교를 넓히는 것에 대하여 내게 이야기하고 할 수 있다면 교육시설을 확장해 달라한다. 마음이 흔들렸다. 고민은 많아졌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할 즈음 아시아 일곱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무너진 교회 터에 돌 더미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중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 했다. 아마도 부자들이 많이 모였나보다. 그곳은 파묵칼레라는 온천이 있는 지역으로 당시 매우 잘사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부자도 없고 교회도 없다. 허무한 돌 더미에 앉아 아내와 몽골학교 얘기를 했다.
지금 우리 몽골학교는 분명 공간이 부족하다.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더 큰 시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교실도 필요하고 운동장도 더 넓으면 좋겠다. 그런데 처음 우리 학교는 구의동 지하실에서 시작했다. 8명뿐이었는데도 너무 좁은 곳이었다. 지금 학교로 옮기기 직전의 학교는 컨테이너 교실이었으며 골목이 우리학교 운동장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건물을 원했고 지금의 장소에 드디어 학교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 또 더 넓은 곳을 원하고 있다. 마치 한국교회의 논리처럼 말이다.
건물을 초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교를 만들고 싶다. 이것이 미래교육의 갈 길이며 나섬과 나의 철학이며 삶의 방식이다. 더 이상 건물은 아니다. 건물에 종속되지 않는 학교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다시 허무하게 무너질 건물로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지으려한다면 우리도 똑같은 실수와 모순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여 세상에 하나뿐인 교회와 학교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학교와 교회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