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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남의 터 위에 세우는 교회


<남의 터 위에 세우는 교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내가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 "그의 일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요,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5:14-21


우리나라는 대기업도 밥장사를 한다. 중고등학교 학생들 급식 사업에 거의 대기업들이 싹쓸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밥장사까지 대기업이 하려는 것은 왠지 안쓰럽다 못해 서글픈 생각까지 들게 한다. 
하긴 우리나라 대기업이 어디 그런 경계선이 있는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중소기업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해서 얻은 노하우까지 대기업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슬쩍 훔쳐가거나 모방하여 장사를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기업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장악하려는 현실 속에서 중소기업의 생존권은 언제나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중심이 되는 산업구조가 더 건강하다고 말만하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회는 대형교회와 몇몇 특화된 중소형 교회들뿐이다. 지역교회의 개념은 점점 사라질지 모른다. 교인들은 대형교회를 선호한다. 

얼마 전 통계청의 보고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감소했다. 카톨릭의 성장과 비교할 때 참으로 충격적인 통계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는 성장한다. 대형교회는 언제나 철옹성이다. 작은 교회는 점점 작아지고, 큰 교회는 점점 커져간다. 심각한 교회의 양극화다.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는 선배는 자기들 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을 하던지... 가슴아픈 이야기임에도 아무런 가책도 없다. 점점 죽어가는 작은 교회들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대형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만 관심을 갖는다. 자기 교회의 성장과 성공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한국교회의 침체와 위기를 함께 고민하기 보다는 점점 늘어가는 교인들을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황홀한 비명만 늘어놓는다. 그들에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교회 공동체에 대한 고민과 아픔은 없다.  

문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대형교회들이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한답시고 난리법석이다. 

풍부한 돈과 인적자원을 동원하면 대형교회가 외국인근로자 선교를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너무도 쉽게 그 일을 해낸다. 

우리 선교회에 몽골인 자매가 있었다. 아주 예쁘고 똑똑한 자매다. 한국말은 물론이고, 영어도 능통하다. 한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고 경기도 구리시 어딘가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그녀는 열심히 살아가려고 했다. 물론 교회에도 열심이었다.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우리 선교회에서는 몽골인 예배의 통역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 점점 성장해 갔다. 나는 그녀의 성장에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무척이나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몇 년 전 나는 그녀에게 신학공부를 제안했다. 서울장신대에 입학을 시켰다. 물론 다른 외국인들에 비하여 훨씬 공부도 잘했다. 우리는 어려운 선교회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학비를 지원하고, 매달 교통비와 책값을 지원했다. 우리에겐 참으로 힘겨운 지원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국 신학생들에게도 하지 못하는 큰 부담이었다. 일 년을 그렇게 지원하고 공부를 시켰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몽골자매는 우리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선언을 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교회를 떠났다. 그저 집과 가까운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조금은 어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말이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너무도 황당했다. 앞으로 몽골의 교회 지도자를 키워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시작한 일인데, 너무도 당황스러운 통보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녀를 만나야했다. 

“왜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나는 거지?”
“목사님, 죄송해요. 저는 그냥 떠나게 되었어요.”
“우리 선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아꼈는데...”
“목사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 수 없이 떠나 보내야했다. 너무도 허탈한 이별이었다. 일 년 이상을 우리는 힘겹게 지원하고 키웠는데... 그래서 앞으로 우리의 선교 비젼을 위하여 지도자로 준비시키려했는데... 그녀는 말도 없이 어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떠났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을 접한 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다름 아닌 우리 동네 대형교회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의 몽골인 모임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사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키우던 자매였는데 그들은 아무런 예고나 양해도 없이 돈으로 그녀를 스카웃한  것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식 논리가 통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우리 큰놈 영규가 그 교회에 갈 일이 있어 가던 날 복도에서 우연이 그녀를 만났단다. 얼마나 당황하던지 그녀는 우리 큰놈 영규의 얼굴을 보고는 훔칫 놀라며 도망치듯 가더란다. 

얼마 후 다른 몽골인들을 통하여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난으로 돈이 필요했을 그녀에게 돈을 주겠으니 우리 교회로 오라는 제안은 너무도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돈이 필요했을 그녀에게 우리보다 더 많이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돈 때문에 그곳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선교회에서 주는 20-30만원보다는 그 큰 교회에서 주겠다는 돈이 더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교회의 윤리와 목회 윤리도 무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돈 앞에서는 모든 것이 통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큰 교회를 이루고 싶은지도 모른다. 큰 교회가 되어야 큰돈이 모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하는 선교와 목회는 더 큰 교회를 만드는 투자다. 투자하면 사람은 모인다.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은 돈으로 사오면 된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골격을 이루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끌고 온다. 가난한 선교회의 고통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일 뿐 그들의 고통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 각개전투 중이다. 우리에게 동역자니 일치와 연대니 하는 말은 없다. 오직 치열한 전쟁뿐이다. 죽기 아니면 사는 전쟁만 있을 뿐이다. 너무도 슬픈 전쟁이다. 사랑은 무슨 사랑이며, 동역은 무슨 개소리 같은 동역인가? 그것은 나중에 모든 것을 다 장악한 강자가 다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약자들에게 부스러기를 나누어 줄 때 하는 말이다.   

내가 잘되고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논리 앞에 무슨 목회 윤리가 필요한가? 이미 한국교회에 그런 사치스러운 목회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으로 일꾼을 사가는 교회의 철저한 성장논리 앞에 우리 선교회는 너무도 무기력하다. 

대형교회에서 외국인근로자들은 하나의 장식품이다. 그들은 장식품으로 프로그램으로 이용될 뿐이다. 진정 그들에 대한 선교적 가능성과 비젼은 필요없다. 다만 보여줄 그림으로 장식품으로 이용될 뿐이다. 

우리 한국교회에 그것도 대형교회에 그런 의식이 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도 의식도 없는 교회에서 가난과 소외에 대한 의식은 사치다. 그것도 잠시 교인들에게 장식품으로 필요한 프로그램으로 이용될 뿐이다. 부자가 되는 길에서 잠시 그런 정도의 자극이 필요할 뿐이다. 가난과 소외의 그늘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알량한 자선은 보통의 부자 교인들에게 잠시 그들의 무한한 욕심과 야욕을 부드럽게 치장하는 포장용에 불과할 뿐이다.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것보다 얻을 이익이 더 크다는 속셈이 그들에겐 이미 있었다. 이미 계산은 끝난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은 선교회에서 키운 지도자들을 그렇게 간단히 스카웃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몽골 자매에게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이 있을 것을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 정도는 껌 값이다. 무조건 데리고 와라. 

대형교회는 윤리가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블랙홀 같은 흡입력만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물리학적 힘의 논리만 있을 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고백이나 고민은 없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공룡과 같은 괴물이 되었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살찌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그 괴물이 살 날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한국교회를 망치는 것은 대형교회다. 그들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그들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것이 작은 교회들과 특수목회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것을 먹지 않고, 그들의 생존기반인 작은 교회를 먹어치울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작은 것들을 무참히 먹어치우면서 살찌고 자란다. 그러나 그 한계는 분명하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을 다 잡아먹고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논리는 동물의 세계만큼 교회와 목회의 현장에서도 적용된다. 그러나 동물들은 스스로 절제하고 자기정화의 길을 통해 생태계를 보존하는 능력을 갖는다. 교회와 목회 현장은 어떤가?

이미 교인은 늘지 않고 수평이동으로 옮겨갈 뿐이다. 오히려 감소하는 교인과 성장하는 대형교회... 이 안에는  논리적으로 심각한 모순이 있다. 작은 교회들은 죽어가고 교인들은 큰 교회로 옮겨간다. 전체적인 교인은 줄어도 대형교회는 성장한다. 그들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성공을 즐기고 있다. 

대형교회 그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한국교회는 죽어간다. 그 즐거움과 비례해서 반드시 우리는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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