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라는 말이 이렇게 다양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근자에 들어서다. 어린아이들도 달라진 것을 손자와 손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가 자라던 시대와는 다른 종족임을 느낀다.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인간의 존재 양식은 과거와 다를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니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다.
올 초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인공지능은 나 같은 장애인들에게 너무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성경 구절을 찾는 일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한 정보를 찾아주는 일까지 내게는 큰 비서 역할을 해주고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도와주는 인공지능이야말로 내게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오늘은 몽골 학부모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게 나이가 70살이냐 묻는다. 그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나 늙게 보였나 보다. 실제로 나의 일상과 삶의 양식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시각장애라는 것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럴만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과 상상력만큼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형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sns 같은 것들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인공지능도 매우 초보적인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만 내 머리를 가득 채운 상상의 자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상상력과 생각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이니 말이다. 다양성을 실감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목회와 교회의 미래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다양한 교회가 필요하다. 다양한 목회가 요구된다. 다양성을 목회와 교회의 선교적 자산으로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생각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그래서 그럴만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목회자를 키워내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은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새롭게 드러난다. 각자의 욕구도 달라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다양하다. 가족의 유형도 달라지고 있다. 혼자 사는 이들이 많아지고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부부가 늘고 있다. 초고령 사회,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탈북자들도 이웃이고 이주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우리 학교들을 채운다. 이제 교회는 다양한 그들의 욕구를 받아줄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 다양한 교회가 필요하다. 큰 교회가 아니라 작더라도 다양성을 대변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나섬교회는 다양한 교회의 상징이다. 이주민 나그네들을 섬기고 선교하는 교회로 세워졌으니 우리 교회는 다양성의 코드로 만들어진 공동체다. 작은 자들과 약자들을 위한 공동체이며, 환경을 비롯하여 생명과 평화라는 선교적 의제를 잃지 않으려는 우리의 목회 방향도 그렇다. 초고령 사회에 맞추어 은퇴자들과 함께 시작한 뉴라이프 선교 사역도 마찬가지다. 역파송 선교사들을 보냄으로 이전의 선교와는 다른 선교모델을 만든 것도 다양성의 목회와 선교이다.
우리의 이런 경험을 더 확장하여야겠다. 그래서 미래교회를 만드는 모임을 구상하고 있다. 다양한 목회적 요구에 응답하는 모임을 만들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지만 다양한 목회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돕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에 있어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에 나는 여전히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