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며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마치 목사를 위한 것처럼 느끼게 할 때다. 마태복음 10:14절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과감히 돌아서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도 그런 경험을 하신 것일까?
목회를 하며 비애감과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특히 작은 교회일수록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는 목회자는 더욱 많을 것이다. 보이던 교인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목사는 그 교인에게 신경이 쓰이고 마침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고 몹시도 자학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고 괴롭다. 그래서 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스스로 목회에는 은사가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이제는 그만 접어야겠다는 생각까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내가 왜 목회를 시작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한동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런 상처가 싫어 유목민 나그네 목회를 오랫동안 해왔는지도 모른다. 한국인 교회보다는 이주민 나그네 목회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그네들은 어차피 여기가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니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니 잘 가도록 기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고 그것이 이주민 목회의 단점이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나섬을 지키며 살아왔다. 가는 이와 오는 이가 만나고 스쳐 가는 것이 인생이고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임을 나는 나섬에서 배웠다.
그러나 한국인 목회는 달랐다. 왜 다르게 여겼을까? 누군가 찾아오면 반갑고 고맙다가 한동안 보이지 않고 떠난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은 너무 아프고 힘들어진다. 기분은 언짢고 속은 불편하며 목회할 의지마저 사라지고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괴로워진다.
오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를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목회자인 나를 위하여 교회에 나오라 하지 않았다. 목사를 위하여 예수를 믿으라 가르치지도 않았다. 정말 예수를 제대로 믿고 살자고만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내 목회가 틀렸다. 나 자신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다. 그분의 양일뿐 내 양은 아니다. 나는 양치기 목동이다. 잠시 맡아 꼴을 주고 물을 마시도록 강가로 인도하는 목동이다. 진정한 목자는 예수 자신이며 나는 잠시 맡았을 뿐이다. 물론 게으르고 부족해 떠나는 양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는 적은 양무리만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말해야겠다. 나를 위하여, 목사를 위하여 교회에 나오지는 말라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예수 믿고 살라고. 가는 교인들은 무심하게 떠나 가지만 남겨진 목사는 너무 아프다. 그런 마음고생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나 내게 자유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어차피 여기에 살고 있음은 이곳이 부르심 받은 곳이고 내게 주신 일터이며 마지막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떠나간 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떠나갔음에도 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마디는,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려 했고 끝까지 신앙 안에서 지키고 싶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힘들고 괴로운 인생이지만 그 안에서 하늘의 뜻을 찾아가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를 함께 나누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처럼 괴로워했고 공감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려 했다. 나는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목회자가 아닌 전인적인 목회자로 살고 싶었다. 정말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살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왔다 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기억난다. 좋았던 추억도 언짢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워버리련다. 남은 삶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내 갈 길 남아 있음이 감사하다.
때마침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 집사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이다. 그런데 집사님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라 한다. 온몸에 전이가 되어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집사님은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담담함을 넘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너무 평안하다. 믿음이 참 좋은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그분을 위로하다 내 자신을 생각했다. 나는 오늘도 실패했다. 나 자신에서부터 목회까지 오늘도 나는 실패한 목사임을 느낀다. 생명에 대하여도 인간에 대하여도 자유함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오고 감은 내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내가 아픈 것은 그 뜻 안에 머물지 못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