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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공간에 갇힌 교회 , 속도를 지배한 사람들


공간에 갇힌 교회, 속도를 지배한 사람들

<속도를 지배한 사람들>
  몽골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우리네와 사뭇 다르다. 그들은 아이들이 태어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이면 아이들의 양 발목에 끈을 매어 그 보폭을 조절한다. 유목을 하는 그들에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에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아이들의 발목에 줄을 묶고 그 보폭의 사이를 줄이는 것이다.
하루 종일 밖에서 양을 치다가 돌아오면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는 말을 타고 집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면 반드시 1킬로 이내에서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걸어봐야 그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속도를 지배하는 그들의 유목문화 때문이다. 그들은 공간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키우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을 벗어나 속도와 시간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매우 의미있는 양육법이다.

  반대로 우리는 아이들을 공간속에서 키우려 한다. 방에 가두거나 혹은 등에 업어 키우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들이 어딘가로 자꾸 나가려하면 엄마는 놀이방에 장난감을 가득 채우고 그곳에서만 놀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간을 벗어나면 큰일 난다는 의식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금을 그어 놓고는 그 금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경고문을 붙여놓는 문화는 우리에겐 너무 자연스럽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공간속에 갇힌 삶을 산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이다.     

  그러나 몽골 유목민들은 결코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법이 없다. 그들은 공간이 아닌 속도와 시간을 지배하는 문화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칭기스칸의 전쟁은 공간을 차지하는 전쟁이 아니라 시간과 속도를 지배하는 전쟁이었다. 그는 모두가 국경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공간이 아닌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다.

  모두가 성을 쌓고 그 성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들에게 성을 부수고 더 멀리 달려가는 유목적 삶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공간보다 시간과 속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다.
비록 작은 조랑말이지만 그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와 그가 차지하는 공간은 비례했다. 달려서 도달하는 곳이 모두 그의 것이다. 달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속도를 내고 시간을 지배하는 싸움이다. 그 싸움의 실체는 결코 인간이나 공간이 아니다. 그들은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공간속에 갇힌 인간들을 해방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왜인간이 그렇게 스스로를 제한하며 공간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그렇게 13세기 초엽에 이미 공간이 아닌 속도와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이룩한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집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게르라고 하는 천막집은 언제나 허물어뜨리고 이사할 수 있는 이동식 집이다. 그 집은 불과 한 두 시간이면 조립할 수 있고, 빠르면 삼십 분 내에 집을 허물 수도 있다. 언제나 옮길 수 있는 편리한 집이다. 그러므로 이사하는 것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다. 이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의 흐름 앞에 그 자연을 지배하려하거나 거스르지 않는다. 가라하면 언제든 떠나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공간은 중요하지 않다. 남북 1500킬로미터, 동서 3000킬로미터의 넓은 몽골초원이 그들의 집이다. 그 안에서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넓은 곳이 있다면 그곳도 갈 수 있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더 중요하다. 속도가 더 소중한 가치이다. 속도만 지배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디지털 시대의 가치와 발상이 이미 그들에게는 존재했던 것이다.     


<공간속에 갇힌 인생>
  임마누엘칸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한 번도 떠나 본적이 없다던가?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교통이나 여러가지 조건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째든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자못 어색하고 두려운 일이다.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주는 늘 기본적인 거추장스러움과 모험심을 동반하는 것이 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십 년 동안 살았다. 우리 집사람도 나와 비슷하지만 우리 부부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짐을 옮기는 것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것보다 사실은 게으르고 귀찮아서 이사할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요즘 이사를 몇 번 했느냐에 따라 재산이 증식되는 것에 비하면 우리는 재테크에는 원시적인 사고를 하고 산다. 
  더욱이 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부터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내 사무실에서도 내가 쓰는 물건은 반드시 있었던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먹는 약은 반드시 손을 뻗으면 오른쪽 10도 각도에 있어야 하고, 성경책은 읽지도 못하면서 반드시 왼쪽 11시 방향에 있어야 한다. 볼펜은 책상 오른쪽 구석에 위치해 있어야 하고 컵은 왼쪽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이미 내 마음속에 그 물건들의 위치가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위치가 바뀌는 날이면 나는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나는 누구보다 내 방에 누군가가 들어왔었는지를 알아차리는데 놀라운 감지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댔는지 아닌지를 아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사실 단순하다. 바로 공간과 위치를 살펴보면 쉽게 알게되는 것이다. 공간과 위치를 변경하지 않는 내 버릇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공간속에서 살아가며 그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에 대하여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다. 농경문화 속에서 살아온 관습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우리네 한국인들은 자기 집이나 공간을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집착이 강하다. 돈을 벌면 가장 먼저 하여야 하는 것이 집을 장만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좋은 곳에 매장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은 화장과 더불어 작은 납골당에 보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것도 오래전의 일은 아니다. 
살아서도 좋은 곳, 죽어서도 좋은 공간속에 묻혀있기를 원하는 우리의 문화는 몽골의 유목문화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들과 공간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이렇듯 다르다. 


<공간속에 갇힌 교회>
한국교회는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건축 중이다. 누가 크냐하는 경쟁의식 때문일까? 가장 큰 교회를 소유하는 사람이 일등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교인이 늘어나서 교회가 필요하다니 정말 한국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다 채울 수 없는 교인의 폭발적인 성장 때문에 그렇게 많은 재정을  투입하여 교회를 건축하여야 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하긴 나도 몇 번의 건축을 해 보았으니 결코 예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나친 건축은 하늘의 뜻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도 어쩌면 공간을 지배하며 살아온 우리의 문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반도의 작은 땅에 살면서 공간을 지배하려는 한이 숨겨진 것이 아닐까?
  몇 평짜리 건축을 하였느냐에 큰 관심을 가진 우리 교회의 자랑이 몽골인들에게는 하수들의 땅따먹기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얼마나 큰 게르(집)에서 사느냐에 결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공간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공간의 크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간과 속도이다. 얼마나 변화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한 곳에 머무는 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공간자랑은 웃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공간적 사고에서 시간과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디지털 시대의 사고로 전환되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가 아직도 아날로그의 공간속에 갇혀져 지내려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결국 중세교회의 몰락을 반복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간과 변화를 이끄는 교회>
이제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가 망하는 것은 우리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화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니 너무도 허무하게 망할지 모른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경고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사진관을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직은 남아있다고 하지만 공중전화도 없어질 것이다. 이미 공중전화를 사업의 기반으로 하였던 한국통신과 같은 회사는 공중전화 사업부분에서 일 년에 4,000억 원의 적자를 본다고 한다. 코닥과 같은 필름회사는 존재도 없이 사라졌다. 한때는 전세계를 지배했던 필름회사가 아니던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정말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한 십년쯤만 지나도 우리 주변에서 보던 주유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때쯤 휘발유 차는 사라지고 모두가 전기차로 바뀌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돈 잘 버는 정유회사이지만 그 얼마 후 정유회사는 골동품 회사가 될지도 모른다. 변화하지 않으면 오늘이 보장될 수 없다는 진리 앞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롭지 못하다.
한 곳에 머물러 '여기가 좋다'고 '오늘이 좋다'고 편히 지내자며 지금을 자랑하는 것에 속지 말라. 자랑하는 순간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城)을 쌓고 지금을 지키려는 자들, 고정관념이나 기득권의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려는 교회에 대한 미래 사회의 경고다.
공간속에 갇힌 교회에서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조의 길을 찾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운 시대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며 속도와 시간을 지배하는 교회가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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