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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유목주의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 (2)


-길을 만들고, 그것을 네트워크하라-

몇 년 전 이정일 목사님 부부를 모시고 우리 공동체 스탭들과 실크로드에 간 적이 있다. 그 때 우리 일행은 실크로드의 관문이라는 중국 신장의 우루무치와 천산 그리고 투루판을 다녀왔다. 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길이다. 누군가 실크로드의 역사를 반주류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나에게 실크로드는 복음과 문화의 소통이 이루어진 길이다.
그 실크로드를 누가 지배하였는가는 세계사의 판도를 바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아니면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아니면 한나라의 무제이거나 몽골의 칭키스칸이든지 간에 누가 그 길목을 지배하는가는 역사의 판을 바꾸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길은 역사다. 길을 차지하는 사람이 역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누가 길을 차지할 것인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성공의 기준이다. 길을 만드는 사람만이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길은 유목민들에게 무척이나 중요하다. 길을 만들지 못하면 유목민이 아니다. 유목민은 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길은 창조다. 그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네트워크하는 것이  바로 성공의 비밀이다. 유목주의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돌궐족의 장군이었던 돈유쿠크의 묘비에 남겨있다는 유명한 말 한마디는 여전히 유목주의의 명제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 라는 말이 새롭게 통하는 21세기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가가 미래의 삶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가 유목민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애급의 고기 가마 옆에서 편안하게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떠나라고 하셨다. 평안한 노예인가 아니면 고달픈 자유인인가? 자본주의는 우리를 편안함 속에 가두어 놓고 노예처럼 살아가도록 길들였다. 직장이라는 공간속에 가두어 놓고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붙잡아 놓았다. 매달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우리는 편안한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편안한 노예처럼 살다가도 문득 우리 내면의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현대인이 아닌가? '하루라도 빨리 여기를 떠나야지'하면서 떠날 날을 기다린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제자리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처럼 용기없는 자신을 꾸짖고 좌절하기도 한다. 막상 떠나려 해도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길을 모르니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가고는 싶어도 길을 모른다.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동물처럼 마치 집안에 가두어져 길들여진 그런 짐승들처럼 울타리가 없어지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떄문에 떠나지 못한다.
그런 히브리 백성들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다. 모세는 그들을 이끌고 애급을 떠난다. 그들이 가려는 곳은 어디인가? 당장은 광야이다. 그들이 먼저 가려는 땅은 아무 것도 없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길이 없는 사막이다. 방향표시도 누군가 먼저 가서 닦아논 길이 아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맨 땅이다. 황무지의 그 무서움 자체이다. 길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두려움이며 공포다. 그런 광야가 그들이 가려는 곳이었다. 왜? 편안한 노예보다 고단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자유를 위하여 편안함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통이 없이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가 유목적 삶을 결단하길 원하신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저앉아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의 뜻이다.
하지만 편안한 노예가 되려는 자들에게 유목주의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애급의 편안한 노예인가 광야의 두려운 자유인인가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 선택에는 원리가 있었다. 남아 있겠다고, 조금 더 편안하게 잘살아보겠다고 떠나기를 주저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강요도 없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 이후에 그들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아마 '잘 먹고 잘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 죽었다'는 말 정도로 남겨졌을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 말도 별 의미가 없다. 잘 먹고 잘살다가 죽은 것은 기록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느 역사책에도 그런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반면에 광야로 떠난 사람들의 기록은 무수히 많다. 그들이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의 기록은 넘쳐흐른다. 광야의 두려움을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있다. 고단한 자유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목사님, 저도 여기 와서 사역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그런데 올 때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와야 한다. 여기서는 자네의 월급이라는 것이 없어"
"고민하고 기도하고 올께요"

십 수 년 전 우리 공동체에 왔던 이경선 전도사 이후로 비슷한 친구 하나가 얼마 전에 내게 와서 한 말이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지금은 우리 공동체서 일을 돕고 있는 중이니 얼마나 가려는지 궁금하다. 끝까지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기를 바란다. 

길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움 같은 것이 있다. 매일같이 길을 닦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성서의 히브리 민족은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매일같이 길을 내고 길을 만드는 삶이다. 물론 한 곳에 머물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길을 닦는 유목적 삶을 원하셨기 때문에 잠시도 평안히 쉴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죽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른 채 그들은 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죽어야 했던 것이다. 길이 생명이며 곧 무덤이다. 한 곳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하여야할 곳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곳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광야의 유목민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은혜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광야를 선택한 것이 옳았던 것이다. 비록 힘든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 두셨다. 그 이후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살도록 안내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먼저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고달픈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두셨던 것이다. 그 기록에는 그들이 참으로 가치있는 삶을 선택했다는 여백의 기록도 있었다.
안락한 노예가 아닌 힘든 자유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이라는 결론이다. 그것이 유목주의이다. 유목적 삶에 대한 무한한 하나님의 뜻이다.

몽골의 길은 참으로 우습다. 언젠가 몽골에 가서 배운 것이 있다. 초원에 나갔다가 우연히 장대비를 만났다. 갑자기 불어난 비가 길을 덮어버렸다. 길이 없어진 것이다.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길이 없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눈앞에서 길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순하게만 보이던 몽골인 운전사의 눈이 갑자기 독수리눈처럼 매서워진다. 눈의 촛점을 다시 맞추는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길을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에게 묻지도 않는다. 우리 일행은 모두 두려움이다. 공포다. 이러다 큰 사고가 날 것 같은 무서움이 밀려온다. 그런데 몽골인 운전사는 요동하지 않는다. 

유목적 삶은 단순하다. 단순하지 않으면 유목민이 될 수 없다. 단순하다는 것은 복잡하다는 것의 반대다. 복잡하면 망한다. 그것이 유목주의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 유목민이다. 운전사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자!'
운전사는 운전대를 힘껏 잡고는 갑자기 옆의 초원으로 차를 달린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목민의 철학이다. 길이 없어졌다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 길은 어디든 존재한다. 문제는 길에 대한 선입관이다. 고정관념일 뿐이다. '아, 저것이다' 내가 그날 배운 소중한 깨달음이다.

몽골의 칭키스칸은 길을 내면서 동시에 길을 네트워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효과적으로 연결한 길을 통하여 수집된 정보와 자료를 공유하며 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한다. 그것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길을 네트워크하는 것은 다름아닌 속도와 길을 연결하는 것이다. 길이라는 가시적 공간과 속도라는 비가시적 시간을 네트워크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겠는가? 
원방형의 길을 내고 그 원방형의 길 중에서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여 말을 탄 전령의 정보와 모든 자료가 한곳으로 집중된다. 물론 중간 중간에도 길을 이어주는, 마치 이어달리기 선수들처럼 더 빠르게 네트워크가 되어 있다. 가장 빠른 길을 네트워크하라. 그리고 가장 빠른 기마병이나 전령으로 그 정보를 전달하게 하라. 이것이 네트워크이며 속도의 마술이다. 그 속도는 길 위에서 상승한다. 길이 네트워크되어 속도를 더 빠르게 이어주는 것이다. 놀라운 발견이다. 그렇게 몽골제국은 모든 나라를 점령하고 지배했다. 아무도 그들의 길이나 속도를 네트워크하는 비밀을 모른다. 그들만의 노하우다.
  
21세기는 길을 네트워크하는 자들의 세계다. 이에 나섬공동체가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나섬이 꿈꾸는 세계선교의전략이다. 곧 선교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도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그 네트워크에 대한 비전이 있다. 열방에서 온 사람들을 훈련시켜 역파송하는 것이다. 지금은 몽골과 이란, 중국과 인도, 터키와 필리핀 등의 나라들이지만 곧 전세계의 나그네들을 훈련시켜 역파송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역파송의 선교사들을 적절히 연결하는 전략을 세운다. 마치 길을 네트워킹했던 제국의 유목민들처럼 말이다. 역파송은 새로운 선교적 길을 내는 작업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전세계를 누비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제는 유목민들을 통한 역파송의 전략도 매우 의미있다. 과거의 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략의 가치와 의미도 새겨보아야할 때이다.
더 좋은 선교의 전략은 역파송의 선교사와 한국인 선교사를 이어주는 것이다. 한국인 선교사의 선교적 열정과 비전을 역파송된 현지인 선교사들의 삶의 현장에 이어준다면 그 역동성은 상상을 불허한다.

나섬에서 보낸 보르마라는 몽골인 선교사가 있다. 그녀를 몽골의 한국인 선교사께 연결하였다. 보르마선교사는 수년전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로 왔다가 신앙을 갖게 되었고, 장신대에서 신대원까지 졸업했다. 나섬공동체와 부천의 한 교회가 연대하여 자국으로 파송했으니 나섬이 보낸 역파송 1호 선교사이다.
보르마선교사를 몽골에서 선교하던 한국인선교사와 이어줌으로써 부족한 목회훈련은 자연스럽게 한국인 선교사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이로서 한국인 선교사의 선교에 대한 비전과 전술, 현지인 선교사라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어우러지니 가히 그 시너지는 어떨까 상상해 본다. 
새로운 길을 내고 그 길을 네트워크하는 것은 21세기 성공의 지름길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간다는 것은 모험이지만 그만큼의 소중한 댓가는 주어진다. 다른 사람이 걸었던 길과 달리 새로운 길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숨어있다. 마치 개발되지않은 노다지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을 노다지의 충만함으로 볼 것인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볼 것인지의 판단은 자신의 몫이다. 그 결과도 그것을 선택한 사람만이 가진다. 확실한 사실은 이미 역사 속에 수도 없이 많은 증거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성서의 히브리민족이 광야로 나와 길을 만들고 약속이 있는 백성으로 살아감으로서 인류의 주인공처럼 인정받게 되었다는 기록은 사실을 넘어 진리가 되었다.
길을 내는 자와 성을 지키고 사는 자의 삶은 다르다. 그 선택도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역사를 믿는다면 오늘의 결단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용기있는 자만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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