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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유목주의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5)


-국경없는 세상과 교회


1999년 5월 처음 몽골을 방문했었다. 우리 공동체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이 외환위기로 인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돌아간 몽골인들이 필자와 몇몇 인사들을 초청하여 방문하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100명이 넘는 몽골인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하여 주었고, 한 식당을 빌려 함께 만찬을 나누던 그날의 감동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날 나와 반갑게 만난 친구들 중 몽골인 밧촐롱이 생각난다. 그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인데 머리가 좋기로는 아마 내가 만난 몽골인들 가운데 그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한국말을 구사하는 그의 능력은 탁월했으며, 그는 전세계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사람이다. 그 후로 내가 몽골에 가면 그는 언제든지 나의 안내인이 되어 주었고, 때로는 그의 차에 태워 여기저기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번은 나를 데리고 울란바타르시 외곽지역을 데리고 갔었다. 자기 고향인 라라흐 지역을 지나 조금 더 가더니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목사님, 저기서부터 저 끝까지가 제가 가진 땅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란다. 당시만 해도 조금 눈이 보이던 때라 그곳을 쳐다본다. 어디서부터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진장 넓은 땅이라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얼마나 되는 땅인지... 그가 내게 가르쳐준 땅의 넓이는 우리가 가늠하기에는 너무도 넓다. 그들에게 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 다르다.
우리는 그만한 땅이라면 측량을 하고 말뚝을 박고, 경계선을 만들고 아니면 자기땅이라는 표지판을 내걸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란다. 분명하지 않는 경계다. 대충어림잡고 자기 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땅에 대한 소유개념이 강해져 많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당시로서는 정말 경계라는 것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목민에게 경계는 없다. 그들에게는 땅에 대한 경계나 구별이나 나누는 어떤 행위도 없었다. 물론 땅이 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우리와는 다른 소유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는 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경계를 넘나드는 어떤 비자나 국경이 없었다. 자기가 가고싶은 곳은 가면되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을 만류하거나 막아서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권리이다. 경계에 대한 고정관념은 없다.

21세기는 경계가 없다. 국경도 없으며 굳이 그것을 나누는 사람은 세계화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기에 충분하다. 경계가 없음으로 여기서 혹은 저기로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사상과 철학과 종교, 문화와 기술이 옮겨가는 것은 순식간이 되었다. 이것이 유목주의다. 새로운 21세기의 트랜드인 것이다. 

경계가 사라진 것은 새로운 트랜드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지금이 새로운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무척이나 두려워하며 움츠리고 있다. 가장 큰 근심은 아직도 그러한 변화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특별히 교회는 이러한 변화와 트랜드에 대하여 너무 안이하다 못해 게으른 것이 사실이다.   
경계가 사라진 것은 또한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언제나 두려운 것이다. 마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은 참으로 난감하다. 예전의 관성에 의지하는 삶은 반드시 큰 시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경계가 없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수 있는 창조의 기회다. 
국경의 개념이 사라지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미래를 보다 가치있는 기회로 삼기 위한 전제가 있다면 그것은 창조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와 혁신은 21세기 유목주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한 것이 미래에도 통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옳다. 고정관념과 아무런 고민없이 체득한 지식은 미래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유목주의는 매우 파괴적이며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과 탐색을 요구한다.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창조적 욕구이다. 창조하는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혁신은 변화에 대한 응답이다. 혁신하는 공동체가 실존할 수 있다.

창조와 혁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노력과 열정이 미래 사회에서 성공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의 유목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도전이며 동시에 기회인 것이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저앉아 있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분명 유목주의는 절망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이전 것에 대한 집착과 고착된 문화나 정신은 유목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에게 유목주의는 야만이며 파괴일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고 혁신하며 무언가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유목주의는 기회이며 소중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창조하는 삶,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만이 유목주의 사회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유목적 삶을 요청한다. 성서는 첫머리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우리가 나그네이며 나그네의 정신과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라는 움직일 수없는 아니 움직이지 않으려는 기득권의 노예가 되지 말도록 반복해서 가르침을 주려한다. 국경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죄의 결과이다. 인간의 욕심이 국경을 만들었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하늘에서는 한 번도 동의하지 않은 인간들만의 선을 그어놓고 그것을 자기 것 혹은 소유라는 이름으로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개방하지 않았다. 그 땅을 밟는 자들은 따로 있다고 했다. 역사는 그것을 거부하고 투쟁하며 부수려는 노력을 했다.        

하늘에서는 국경이나 경계선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그 경계를 그어놓거나 국경을 만들어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죄의 결과이다. 욕심과 이기주의의 결과물이다.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국경이 있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는 독선이 만든 결과다. 그렇듯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고 파괴되고 다시 만들어진 선은 얼마나 많았던가?

국가와 국가, 이념과 이념,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 배운자와 못배운자, 부자와 가난한자,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 백인과 흑인, 이주자와 원주민, 세상과 교회, 성과 속 등등.

이렇듯 우리는 나누고 구별하고 그 가운데에 선을 그어 놓았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의 분단이라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듯 받아들인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선이다. 국경이다. 경계이다. 

유목주의는 그러한 모든 선과 경계를 거부하고 부정한다. 누가 만들어놓은 것인가? 유목주의 삶을 살려는 이들에게 그러한 경계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무너진 세상이다. 이미 그 경계선은 없다고 선언하고 떠나는 이들이다. 세상에 어디 구별이 있는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 내 것인가? 아니다. 언제든지 내 주머니 속에서 저쪽 주머니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경제에도 경계가 없다. 모두가 호환을 전제하여야 한다. 교회의 적이 누구인가? 교회의 적은 정보화 사회이다. 컴퓨터 게임이 그렇고 유목주의가 그렇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그들이 아니라 새로운 유목주의와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교회 자신이 바로 적이다. 새로운 변화의 트랜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적일뿐, 세상이 결코 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조하고 혁신하라고 많은 징조와 기회를 주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가 만든 것이다. 유목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면 교회는 망한다. 경계가 없어지고,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엄청난 트랜드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래 사회의 불가측성에 대처하지 못하는 교회는 동공화될 가능성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이 위기이며 기회다. 교회가 새로운 변화에 창조적이며 혁신적으로 대응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다.

현대 경영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유목주의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미래 사회의 트랜드 즉 경계가 없고, 예측불가능한 미래는 무척 당황스럽다. 그럴 경우에 강조하는 것이 바로 창조와 혁신이다. 이것은 비단 경영학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영역에 걸쳐 유목주의라는 큰 흐름은 결코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특성상 유목주의의 확산은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교회학교와 청년 그리고 교회성장에 적지 않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현재에도 교회학교에 아이들이 있는가? 교회 안에 청년들이 있는가? 대형교회 몇몇만의 부흥을 한국교회 전체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는 남고 뒤에서는 밑지는 장사처럼 보인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교회가 제공하던 즐겁고 유익한 프로그램은 이미 인터넷에 널려 있다. 교회학교의 옛날 서당 같은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한다. 청년들 특히 남자 청년들은 교회에 없다. 왜 그런가? 결혼 적령기 청년들의 비율이 말이 아니다. 여자청년과 남자 청년의 비율이 맞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난리다. 결혼 못한 여자 청년들로 교회 청년부가 노처녀화 되고 있다. 신앙의 힘으로 청년들을 붙잡고 싶지만 이미 교회에는 그럴만한 힘이 없다. 도덕성도 유익도 그럴만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 교회에 창조적 상상력이 없어서 생긴 일이다. 미래 교회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만 매달린 결과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성을 쌓는 교회의 종말이다. 성공주의에 매달린 목회자가 만든 작품이다. 정작 자신은 아무런 윤리적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청년들에게는 마치 청교도가 되라는 식으로 가르친 결과다. 교회가 다 데리고 살아야 할 노처녀들을 누가 구원할 것인가? 예수가 남편이라고? 무책임하다.
유목주의는 무서운 것이다. 모두가 섞어지는 세상이다. 오고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것이 삶이다. 한 곳에 정착하는 세상이 아니다. 대박한번 터트렸다고 무조건 좋아만 할 수 없다. 삼성전자가 일등이라고 자신만만해서는 안된다. 여의도 교회가 엄청난 교회라고 자랑하는 세상이 아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라고 뻐기면 그 순간 날라간다.
경계가 없다는 것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기득권자들에게는 위기이며 작은 자들에게는 기회다. 아니 그 반대다. 가진 자는 더 가질 수 있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겨 큰 자들에게 다 줄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다. 이제 창조하고 혁신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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