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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2-고수와 하수의 차이?
고수와 하수의 차이? 
 창세기 13:1-13


1. 인생은 게임이다. 

우리가 바둑을 두든지, 아니면 장기를 두든지 그 안에는 인생의 법칙이 있다.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리더는 언제나 게임의 룰 안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여야 한다. 선택은 필수적이고 그것이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내가 선택한 결과이며, 우리의 미래는 오늘 내가 선택한 것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중요하다.
우리는 순간순간 선택하여야 한다.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 그리고 내가 자녀를 낳을 때 아들과 딸을 선택할 수 없는 것 외에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 내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내 몫이다. 지금 내 아내는 내 선택의 결과이며, 그 여자와 사는 내 운명도 내 선택의 열매이다.

사람들은 내게 정말 결혼을 잘했다고 한다. 아내를 잘 골랐다는 말이다. 만약 이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긴 그럴 기회도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여러 여자들을 만나 보았으니 말이다. 그들 중 지금의 아내가 나의 가장 탁월한 선택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결정한다. 지금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평생 내 삶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택은 중요하다. 인생이 게임이라는 말은 그래서 하는 말이다. 게임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2. 아브라함과 롯의 게임

그들이 게임을 했다고 규정하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것 같아 보인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지 수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함께 동고동락했던 관계와 울타리를 정리하여야 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들의 재산이 늘어나고 수하의 목동들이 서로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투는 일이 잦아지면서 결국 갈라서는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인간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닌듯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동업을 하거나 동거를 한다는 것은 그렇듯 쉬운 일이 아니다.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브라함과 롯도 결국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마지막에는 헤어지는 선택을 하여야 했다. 인간은 헤어지는 순간에 그의 내공과 인격과 신앙의 정도가 표출된다. 지금까지의 관계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볼 수 있는 순간이 마지막 결별의 순간이다.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이 보인다. 마지막을 어떻게 결판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진정성과 삶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이 게임이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둘 중의 한사람이 먼저, 그리고 또 한사람은 나중의 것을 선택하는 게임이다.
당연히 선택권을 먼저 가진 사람은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는 보기에도 좋고 모든 조건이 괜찮은 것을 선택할 것이다. 마치 축구 경기를 하기에 앞서 심판이 두 팀의 주장과 동전의 앞뒷면으로 공격과 수비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먼저 선택하는 것은 분명히 우월적 위치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사람은 우선적으로 선택권을 가지려고 한다. 우월적 혹은 우선적으로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 소위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거나 체력을 단련하거나 혹은 실력을 쌓고 일류 대학에 입학하려는 것은 모두 그런 이유를 반영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는 조카와 삼촌의 관계다. 우리의 문화적 작대로 보면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는 관계다. 나와 우리 작은 아버지 혹은 외삼촌과의 관계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싸가지 없는놈이라고 해도 누가 먼저 우선적인 선택권을 가질지는 잘알고 있다. 나는 두 번째 아니 나중에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그 게임의 선택권은 아브라함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은 이상하다. 삼촌이 아닌 조카가 먼저 우선적 선택권을 가진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3. 승자의 저주

경매에서 이기는 것이 반드시 진정한 승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 치열한 경매의 과정을 통하여 갖고자하는 것을 소유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자신에게 긍정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경쟁을 통하여 얻었지만 그 결과가 저주일 수도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얻은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니면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출혈을 감당하여야 한다면 그것 또한 승자의 저주일 뿐이다.

기업들이 합병이나 인수를 할 경우에 이런 승자의 저주가 종종 있어 왔다. 자기보다 몸집이 큰 기업을 인수하거나 다 망해가는 기업을 인수 합병함으로 모기업 전체가 위기에 빠지거나 그로인해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이다. 너무 욕심을 내어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선택을 억지로 할 때에도 승자의 저주가 통한다.

선택할 때에는 좋았는데 결과가 매우 심각한 위기나 저주스러운 것으로 주어진다면 그것 또한 승자의 저주이다. 우리 주변에서 승자의 저주는 비일비재하다.

롯의 경우가 승자의 저주에 해당한다. 삼촌인 아브라함보다 우선적으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였지만 그것이 저주의 시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소돔과 고모라는 번성한 땅이었다. 돈이 보이고 성공이 보였다. 그 땅을 선택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성공의 길을 가는 것이라 여겨졌다. 롯의 눈에 성공이 보인 것이다. 롯의 선택은 분명 객관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어디가 좋은 땅인지를 사람들은 알고 있다. 롯도 바보가 아닌 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롯이 이겼다고 축하를 보냈으리라. 그것은 분명 승자에 대한 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승자의 저주였다. 소돔과 고모라는 곧 멸망할 땅이었던 것이다. 단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승자의 저주를 알아야 했다. 승자가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에서는 때로 승자가 저주의 선택을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롯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승자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승자이지만 그것이 축복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 선택이 승자의 저주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얼마 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마터면 승자의 저주에 오를 뻔한 일이다. 처음 며칠은 내가 지고 말았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따지고 보니 만약 우리에게 그 프로젝트가 주어졌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그렇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와 사망을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의 말씀대로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이번 일은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일이었다. 별 실익도 없으면서 욕심이 앞선 것이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하늘의 뜻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경쟁에서 떨어졌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고 화가나 견딜 수 없었지만 나중에 보니 그것이 은혜였다. 승자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다.
        
  
4. 패자의 축복

승자의 저주가 있다면 패자의 축복도 있다.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그것이 저주는 아니다. 때로 실패와 낙오가 축복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분명히 낙오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보니 그 실패를 딛고 엄청난 사업가가 되었다면 그는 실패를 통하여 성공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요단 동쪽이 아닌 서쪽의 척박한 땅을 선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패배의 선택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실패와 척박함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그 척박함을 선택한다. 그것도 조카를 앞세우며 자신은 패배를 주어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너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실패에 은혜와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 기본원리다. 그렇지! 만약 승자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면 그분의 성공 경영학이라는 것이 세상의 경영학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좌절과 실패 안에 축복의 섭리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 비록 내 삶이 힘들고 고난의 조건 가운데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 실패의 삶에도 더욱 의미가 있다는 그 기대 같은 것 말이다.


5. 선택의 기준

'죄수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 검사가 붙잡혀온 조직 폭력배 두목에게 자신의 부하 조직원들이 있는 곳을 자백하면 형량을 감해주겠다고 회유할 때 폭력배두목이 갖게 되는 딜레마가  그것이다. 만약 그렇게 자신의 친구들을 불어 그들이 붙잡혀오고 자신은 그 덕분에 자유롭게 풀려나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문제는 미래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조직원들은 분명 그에 대하여 배신자로서의 보복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딜레마다. 선택 앞에 선 죄수들의 딜레마다. 배반은 보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딜레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딜레마는 아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결정을 하게될 때가 있다. 문제는 딜레마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선택의 기준은 없다. 무엇이 진정 내게 유리한 것인지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가장 좋은 선택은 협력하는 것이다. 서로 윈윈하는 전략이다. 서로 승자가 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협력하는 순간에 모두가 승자가 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역사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때로 그리고 가끔 협력의 단계는 있었지만 끝까지 협력을 통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이기주의 때문이다. 권력을 함께 창출하고서도 권력은 나누지 못한다는 속성 때문일까, 언제나 협력은 무참히도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말에 부자지간에도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왜 그럴까? 동업의 끝이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경험법칙이 작용한 것일 게다. 형제간에도 동업의 끝은 재판장에서 결정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은 독점적 욕망 앞에서 무기력하다. 피를 나누고 혈맹의 약속을 하였어도 그러한 관계의 법칙은 돈과 권력의 속성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선택하여야 하는가? 협력이 아니면 결별이다. 문제는 어떻게 결별하느냐이다.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헤어짐의 모습이다. 만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헤어짐을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만나는 모습보다 헤어지는 모습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가? 그러나 모두들 헤어짐에 대하여 준비되지 못하고 헤어짐에 대한 철학이 없음으로 헤어짐의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특별히 정치를 하거나 사업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만나고 함께 할 때에는 정말 '저들이 헤어질까'라고 의문을 가질 만큼 그 관계가 돈독하다. 그러나 영원한 협력은 인간사에 없을지도 모른다. 만남보다 헤어짐은 더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헤어질까를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모습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무엇이 마지막을 감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양보다.
양보가 선택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선택의 기준일 수 있을까? 역설의 선택이다. 우선권을 포기하는 선택의 기준이다.  

치킨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일명 겁쟁이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양쪽에서 차를 달려 마주치기 직전 먼저 피하는 자가 지는 게임이다. 양보가 없는 두 세력 간의 갈등과 다툼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이러한 치킨 게임은 1950년대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남과 북이 겪고 있는 갈등 정책과 반목의 현실이 이러한 치킨게임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혹은 삼성전자와 엘지 전자간의 라이벌 다툼도 치킨게임의 일종일지 모른다. 아니다. 두 회사 간의 경쟁은 라이벌이지 적의 관계는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두 기업 간의 경쟁은 치킨게임까지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라이벌이든 적이든 마지막까지 배팅하는 모습은 포커판의 치킨게임처럼 보여진다.

이러한 전략적 게임들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성공 경영학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승자의 길이라고 말하는가?
치킨게임을 하기 전에 먼저 양보하는 미덕이 옳다는 것이다. 강제적 양보를 얻어내는 치킨 게임이 아니라 자발적 양보가 더욱 긍정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배려와 양보가 가능한 것은 믿음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와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이 세상에서 삶을, 여유와 너그러움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약속이 얼마나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열방의 아비가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6. 안목을 키워라

우리는 너무 얕은 것만을 보고 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포장되고 잘 디자인된 것뿐이다. 내용과 알갱이는 모른 채 겉만 보고 선택한다. 본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져볼만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보았을까? 롯이 본 것과 아브라함이 본 것은 다르다. 롯은 눈으로 보았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으로 보았다. 믿음의 눈과 약속을 신뢰하는 영혼의 눈으로 보았다.  
그것이 진정 본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안목이 있어야 성공한다.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성공한다. 미래의 가치를 읽어야 진정한 투자가이듯이 성공한 사람은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
미래의 가치에 투자하자. 그러려면 가치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그 척박한 요단 서편 가나안 유대광야의 가치를 보아야 한다. 당장의 이해관계에 얽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은 마지막 승자가 되기 어렵다.
현실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멀리보고 투자하는 사람이 이긴다. 세계적인 부자들의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안목을 갖고 멀리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그리고 냉정하게 가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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