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성공경영학6<야곱아, 나는 틀을 깨는 사람을 사랑한다>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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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하나님의성공경영학6<야곱아, 나는 틀을 깨는 사람을 사랑한다>


야곱아, 나는 틀을 깨는 사람을 사랑한다
창세기 30:29-43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나는 틀을 깨는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 스스로가 틀을 허무는 파괴의 존재양식을 통해 21세기 가장 위대한 기업가가 되었기 때문일 게다. 그는 언제나 창조하고 변혁하는 삶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 기업을 이루어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전세계를 놀라게 하는 아이폰과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괴물을 만들 수 있는 저력은 그의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서 속에 스티브 잡스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야곱이다. 외삼촌 라반의 술수에 말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던 야곱이다. 어떻게 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통탄도 하였을 것이다. 이때에 야곱에게 한 가지 판단이 섰으니 그것은 틀을 깨는 결단을 하는 것이다. 외삼촌과의 게임에서 틀을 깨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틀을 깨기 위하여는 스스로 가장 낮은 확률에 배팅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야곱이 가장 낮은 확률의 게임을 선택하고 라반에게 제안하였을 때에 목동 중의 목동인 라반이 뒤돌아 웃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바보같은 놈...'

상식과 이성의 범주를 넘는 어떤 새로움을 보지 못하면 야곱은 결코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야곱이 이길 수 있는 힘은 얼룩무늬 가축을 만들어내는 창조력이다. 다른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비밀한 상상력이 없다면 이 게임은 결코 야곱에게 기회가 될 수 없다.
  
야곱은 삶에 대한 열정과 치열한 도전의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야곱을 설명하는데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치열함과 열정만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야곱은 누구보다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는 결단력이 있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유연한 창조적 상상력이 있었기에 궁극적으로 축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의 변신이며 비약이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삶을 변혁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얼룩무늬를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신풍나무든 살구나무든 버드나무든 그것이 얼룩무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얼룩무늬 양과 염소를 만드는 것은 상상력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야곱은 틀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사람이다. 

내가 야곱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창조적 상상력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볼 줄 알았다. 꿈꾸고 상상하는 대로 인생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 나섬공동체는 야곱의 기회를 얻기 위해 찾아 나선다. 우리에게는 라반의 비열함과 잔머리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위기감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우리에게 야곱의 기회를 주셨다고 고백한다. 야곱의 기회는 창조하고 변신하는 결단과 상상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회적 기업과 커피볶

나섬에서 사회적 기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하며 최고가 아니라 최초가 되겠다는 철학에 근거한 창조적 도전이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불안정과 열악함이라는 부제가 쫒아 다녔다. 한국교회와 우리사회의 현재 상황 가운데서 이주자를 돕고 섬기며 선교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위기를 느껴야 했다. 이렇게 해서는 오래 갈 수 없다는 위기다. 반드시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안이라는 것이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 스스로 창조하고 변혁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늘 충만했다.  
그러한 위기의식과 새로운 대안에 대한 열망이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사회적 기업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대안과 모델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업에서 커피볶을 시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와 나섬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커피를 통한 선교와 사회적 기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붙잡겠다는 야심찬 도전이다. 정말 이것이 가능할까? 아무런 경험도 노하우도 없는 우리다. 오직 하나, 이것이 우리에게 얼룩무늬 양과 염소를 만들어내는 야곱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강력한 의지가 있을 뿐이다. 한번도 해보거나 생각해 본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비즈니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나섬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회적 기업과 커피볶을 창조하고 세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나섬의 사회적 기업과 커피볶은 분명 새로운 모델이며 창조적 사역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이루어야 할 비전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받고 있다는 마음이며 생각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보다 고통의 그 시간에 대한 삶의 자세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야곱은 분명히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을 해도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외삼촌 라반의 태도에 대하여 무한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아내 라헬을 얻기까지 십 수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라반은 이미 라헬 대신 레아를 야곱의 침실에 보냄으로 첫 번째 배신을 감행했다. 삼촌 라반과 조카 야곱의 동거는 그러한 배신과 그 배신을 극복하려는 한 인간의 치열한 인내와 투쟁의 관계였다. 
배신하면 할수록 야곱은 더 강해져갔다. 배신의 끝이 분명 절망이며 좌절이고 실패로 결론 나야 했지만 야곱은 그 배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신은 고통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 배반의 고통을 극복해 나갔다. 그것이 야곱의 기회이다. 배반의 시간을 축복의 기회로 삼는 야곱이다. 그는 고통을 받았지만 그것에 매몰되거나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기회로 만드는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 

야곱이 가진 고난을 이기는 상상력이란 얼마나 창조적인가! 삶에 대한 한없는 긍정은 우리를 얼마나 새롭게 하는가!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이다. 야곱에게 절망은 곧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얼룩무늬를 만들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긍정이 되었다. 창조적 긍정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창조적 긍정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 공동체 안의 외국인 신학생들을 만나보면 정말 그들이야말로 야곱같은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통을 기회로 만든 사람들이다. 호잣트는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하실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이 갖는 엄청난 힘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는 이미 장신대 신대원 졸업반이 되었다. 이란에서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한국에 온 호잣트였다. 그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다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내게 찾아와 자신의 결단을 고백했을 때 그는 이미 30대 중반을 넘은 나이였다.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낮에는 성수동의 인쇄공장에서 일을 했고 밤에는 서울장신 야간에서 공부했다. 그것도 일학년부터 새롭게 시작 해야 했다. 편입은 없었다. 한국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읽고 쓰는 것은 말하는 것과 다르다. 더욱이 신학적 사유라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아보지 못한 개종자의 신학수업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끝없는 인내를 요청하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 보다 더 힘든 시간이다. 과연 호잣트는 그 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을까? 

호잣트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와 가족은 또한 큰 짐이며 십자가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호잣트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대신한 가족이다. 먹고 살기도 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남다른 집착도 있었다. 공부와 돈 그리고 가족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나 같으면 벌써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도망하여 안정된 삶을 선택하려는 욕망의 굴레에서 고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잣트는 그 긴 시간을 이겨냈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그는 이제 졸업반이다. 야곱의 얼룩무늬 가축떼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다. 그는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겼다. 그가 이긴 것은 고통이다. 고통이 그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지배하고 만 것이다.

얼마 전 호잣트는 이란에서 온 누님들과 17년만의 상봉을 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그는 여기서 한 일가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다시 신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내년이면 그는 졸업을 한다. 17년 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간략히 설명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목사님,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다만 그 시간을 보낸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과 비젼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

호잣트는 오늘도 그렇게 고백을 한다. 나는 그 고백을 믿는다. 그것은 분명히 야곱의 고백이다. 얼룩무늬 가축을 만들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보았을 야곱처럼 오늘 우리 나섬의 지체들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창조하고 상상하는 삶을통하여 그 고통과 배반의 세월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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