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친구가 되려는 교회가 좋다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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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나그네와 친구가 되려는 교회가 좋다


삶이 없는 교육은 공허한 외침

지금 우리 교회 안에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현실이다. 여전히 사회적 통념을 넘지 못하는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 교회라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던가!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 의하면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25:40) 
즉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옥에 갇히었으며, 나그네 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돌봄이 예수님에게 한 것과 동일한 헌신이며 봉사라는 것이다.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삶이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말씀에 대한 들음은 실천적 삶을 동시적으로 요청한다. 말씀은 삶이고 실천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성육신 사건에 대한 말씀은 그러한 측면에서 무척 의미가 깊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결단이다. 그분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사랑에 머물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모범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은 사랑의 구체적 행함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 또한 구체적인 사랑의 삶임을 보여준다. 고난의 십자가와 죽음을 보여주심으로 믿음은 곧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십자가와 성육신 사건처럼 말이나 관념이 아니라 몸이며 삶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육과 신앙은 삶과 더불어 행하고 있는가? 무수한 말만 있을 뿐 사랑이 없다는 세상의 수군거림을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시기나 질투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방적 비판이라고만 여길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의 기독교 교육에 책임이 있다. 우리의 아이들을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이 아닌 삶이 있는 기독교인으로 키워야 한다. 모두가 이것을 원하지만 왜 안되는 것인지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눔과 섬김이 없는 기독교는 허구다. 이것은 이미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나 혼자만의 과장된 선언은 아니다. 이방인에 대한 철저한 배타성으로 자신들만이 오직 선한 백성이라는 독단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판하셨다. 그들이 바리새인이며 사두개인이었다. 율법은 존재하지만 삶이 없던 그들의 종교적 삶에 대하여 염증 섞인 고발을 멈추지 않으셨던 예수다.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과 속이 위장된 윤리와 독선으로 가득하다고 분노하시는 예수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비판받던 바리새인들은 아닐까? 지금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면 우리에게 그런 독설을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무섭다. 두렵다. 삶이 없는 기독교가 과연 예수가 말씀하시고 보여 주시려하던 그 사랑의 기독교가 맞는가?
종교교육만 남고 신앙의 실천적 삶은 사라진 교회라면 우리는 불행한 신앙인들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가 무슨 교회인가? 복음 없는 기독교가 무슨 기독교란 말인가? 행함없는 말씀은 얼마나 공허한 외침인가? 삶이 없는 말씀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와 다름 아니다. 그렇게 말해도 결코 과장된 비판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비판하지 않으면 저 돌들이 소리지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미 저 돌들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나눔과 섬김을 가르치라

얼마 전 천호동 모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모은 과일과 쌀을 우리교회의 나그네된 외국인들, 몽골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며 가지고 왔다.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교육하고 있는지 그 지도자를 만나고도 싶었다. 자기들 끼리만의 감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나눔이며 섬김이라는 점에서 그 교회의 작은 사랑에 감격한다. 고맙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려는 모습이 고마운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곳이 또 하나 있다. 정신여고다. 정신학교의 작은 나눔은 매년 거름이 없다. 꾸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곳의 교목 목사님이 누구시더라? 그 학교의 선생님들이 귀하다. 나그네된 자들을 잊지 않고 함께 나누려한 그 마음이 고맙다. 많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 마음이 소중해서 더욱 감사한 것이다. 그 학교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교육은 작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완성되어진다. 진정한 기독교 교육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예배가 있다 해도, 소름끼치는 찬양과 기도가 있다 해도 마음속 작은 사랑의 씨앗이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나섬에는 다문화 어린이집이 있다. 아직 몽골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은 어린이집을 넘어 탁아소 같은 곳이다. 그런 곳을 아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처음 우리 어린이집이 개원하고 어느 날 전도사님 한분이 찾아왔다. 처음 온 손님이다. 무언가 나누고 싶다며 자신의 마음을 작은 나눔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졌다. 함께 동행하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는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전도사님은 분명 멋진 목회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낌으로 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굴도 모르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있다.
  
몇 년 전 의정부 사회교사 모임에서 그 지역 중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찾아와 몽골학교 학생들과 다문화체험교육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를 하고 몽골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그들은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되어갔다. 아이들이 친구가 되니 선생님들도 함께 어우러져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 것이다. 나는 그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국 아이들과 몽골 아이들이 더불어 사랑하고 친구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감격했다.


다문화 시대와 새로운 리더십의 조건

칭기즈칸이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포용과 관용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오만 명이 출병하면 돌아올 때에는 십만 명이 되어 돌아왔다니 그 엄청난 포용력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닷물은 무슨 물이든 다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더럽고 깨끗한 물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 속에 함께 녹아드는 것이다. 무슨 물은 되고 무슨 물은 안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은 바닷물이 되는 것이다.

전세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은 한결같이 다양성과 다문화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인 나라들이다. 로마와 몽골 제국은 그들 중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보라, 그들의 그 흡입력과 관용의 철학을! 
모든 문화와 인생들은 몽골과 로마의 포용과 관용의 철학 앞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제국은 가장 위대한 나라를 건설했다. 칭기즈칸이 그랬고, 율리어스 시저가 그러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그러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제국은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다. 

미국이 그렇게 강력한 나라인 것은 그 나라의 도덕성이 아니라 어찌되었든 함께 살아가는 힘 때문이다. 오바마 같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리더가 될 수 있는 그 사회의 토양이 그들의 힘이다.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적이 아니라 동지를 만드는 능력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민족이다. 그들은 배타적이며 언제나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자랑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고집스럽게 자기들만의 나라를 원했다. 하물며 같은 혈통의 뿌리를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혼혈이라며 거부했다. 거부하면 거부당하는 것이 옳다. 

예수는 그런 유대인 집단에 대하여 비판하신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과 동석하시며,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적을 만들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하시며 사랑의 깊음을 몸으로 보여 주셨다. 십자가가 그런 사랑의 예표였다. 대신 죽음으로 모두가 친구 되라고 유언하셨다. 나누지 말고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도 하신다. 얼마나 벅찬 삶이던가!

바울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 중 스승이다. 바리새인이며 율법주의자였던 그가 예수쟁이가 되니 세상이 결코 우리를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하나다. 성령이 하나이며 예수가 그런 하나 되는 삶을 원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로 했다. 유대인을 사랑하지만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것이 유대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만약 바울의 이방인 사랑이 없었다면 구원은 오늘 우리에게 까지 올 수 없었다. 바울의 노마드 유목민적 삶과 철학이 오늘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누가 21세기 위대한 미래의 리더가 되려는가? 예수처럼 생각하고 바울처럼 살아야 한다. 칭기즈칸처럼 행동하고 로마처럼 안아주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인들 그들을 버리겠는가. 그런  포용력있는 지도자들을 위한 교회가 그립다. 교회 안에 그런 지도자가 그리운 것이다. 나섬으로 찾아오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으니 나그네와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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