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그 편견과 변덕스러움의 이야기2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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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음식, 그 편견과 변덕스러움의 이야기2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고민한다. 이것이 나의 최대 단점이며 한계다. 아직 배가 덜 고파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더 굶어야 한다. 굶는 것이 먹는 것보다 낫다는 소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종종 그 명제는 내게 적용될 수 있다. 차라리 굶는 것이 낫다는 것이 나의 음식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치명적인 흠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음식에 대한 나의 편견과 낯가림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니까. 
음식에 대한 마음을 고쳐볼까하여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먼저는 속에서부터 거부하는 소리가 들린다. 차라리 굶으라는 소리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로부터 주입된 음식에 대한 습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참 음식을 잘 하신다. 무엇이든 어머니의 손만 닿으면 깔끔하고 정갈하며 맛난  먹거리로 바뀌는 것이다. 봄이면 봄나물이 밥상위에 올라온다. 냉이와 씀바귀, 돌미나리 그리고 향기나는 달래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가 그것이다.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압권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된장찌개보다 더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뿐만 아니라 봄 쑥을 버무려 만든 쑥떡은 어떤가!
봄이 지나면 우리 부모님 앞뜰에서 키운 상추니 쑥갓이니 하는 야채는 신선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아버지는 우리가 먹는 채소에 농약을 치지 않는다. 하긴 당연한 것이리라. 봄밭은 언제나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준다. 그중 특별한 것은 쑥스럽게 자란 열무와 가는 파가 아닐까? 열무로 물김치를 담그는 솜씨야 비슷하겠지만 내 어머니의 그것은 남다르다. 가는 파로 담그는 파김치 또한 일품이다.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면 밭에는 오이가 한창이다. 처음 따는 오이로는 오이소박이를 담근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오이소박이를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처음 딴 오이에 부추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는 김치를 담그신다. 그렇게 담그어진 오이소박이는 그날로 절반쯤 먹어치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뿐만아니라 오이를 맛나게 먹는 것 중에 오이무침이 있는데 그 오이무침으로는 집에서 짠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듬뿍 넣고 계란후라이 한 개와 강된장 찌개 몇 숟가락을 넣어 비벼 먹는데 그 맛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한다.
여름 내내 그렇게 밭에서 딴 채소로 만든 요리 외에도 어머니의 음식은 다양해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가끔씩 두부를 만드시거나 지난겨울 준비해두셨던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시는데 특별히 두부를 만드시는 날이면 콩죽을 쑤시고 콩국수를 만들어  한상 멋지게 차리신다. 그런 날이면 온동네 사람들 청해서 왁자지껄 잔치가 벌어지고 하루 종일 집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어머니는 손님이나 이웃을 청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셨는데 그만큼 나누어 주고 함께 먹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시다. 손 대접하기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셨던 모습이 아마도 지금 내가 나섬을 섬기는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여름 장마가 끝나고 한참 무더울 즈음이면 아버지는 밭에서 조용히 땅을 일구셨다. 가을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농부는 언제나 미래를 산다. 지금을 사는 농부는 농부가 아니다. 농부는 언제나 내일을 생각하고 준비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아버지는 늘 그런 분이시다. 남보다 한순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셨다. 아마 그 모습이 내 삶에도 그대로 투영되었으리라.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 역시 자연스럽게 내일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습관이 익혀진 듯하다.

가을은 여름에 준비하여야 한다. 무덥고 힘든 시간을 아버지는 조금도 짜증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흙에서 사시는 분이다. 아버지는 흙을 사랑하셨고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치셨다. 땅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나를 먹였고 가르쳤다. 나를 키운 것은 아버지이며 땅이었다. 나는 흙에서 삶을 배웠다. 내 아버지는 흙과 떨어져 생각할 수없는 분이다. 새벽이면 밭에서 나가셨고 저녁 늦게까지 밭에서 일을 하셨다. 

가을은 분주했다. 가을걷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쁘게 했다. 어머니는 무척 지혜로운 분이시다. 가을은 또 겨울과 다음해 봄을 위한 계절이니 미래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가을에 더 바빴다. 내일을 위하여 씨앗을 남겨야 했고 먹거리를 말리고 저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을은 먹을 것이 많았다. 모든 김장은 아버지가 일군 땅에서 키워졌다. 배추며 무우는 우리 밭에서 나와야 했다. 농약은 물론 주지 않았고 때로 아버지는 배추벌레를 잡느라 하루 종일 밭에서 사시곤 하셨다. 
그렇게 담근 김장은 특별하다. 어머니는 소금이며 젓갈까지 모두 신경써서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고 다른 집보다 양념을 듬뿍 넣고 김장을 하신다. 그 솜씨는 역시 재료가 아니라 정성이며 마음이다. 그런 김장날이면 어김없이 동네잔치가 열렸고 이집 저집 나누어주는 것도 잊지않으셨다. 왜 그렇게 힘들게 해서 나누어 주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그것이 좋다고 답하셨다. 양쪽 다리를 수술하신 후 힘들어 움직이기 어려워지신 이후에도 어머니의 그 유난함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사람이나 혹은 홀로 사시는 분이 계시면 더 나누어주려 하셨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어머니의 삶이었다. 나눔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자체였다.

나는 그분들이 키워서 먹여주신 대로 살았다. 집에서 나온 것, 집에서 키운 것, 어머니가 밭에서 캐온 것, 아버지가 키우신 돼지와 닭, 그리고 계란으로 먹고 살았다. 가게에서 사온 것은 거의 없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땀 흘려 만든 것만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니 남이 해준 음식이거나 혹은 낯선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었음이 당연하였다. 뿐만아니라 어머니의 탁월한 음식 솜씨는 내 입맛을 고약하게 만들었으니 아내는 그만큼 고생을 했다. 아직도 아내는 음식이라면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나보고 오히려 물으며 음식을 하는 아내가 애처롭다. 왜 똑같은 재료로 이렇게 맛이 다르냐고 물으면 아내는 순순히 그것이 자신의 한계라고 고백한다. 그럴 때면 속으로는 묻는다.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어머니하고 아내의 솜씨는 왜 이렇게 다른 거냐고?'

내가 다문화 이주자들과 목회하며 살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으니 선교지라고 하는 곳도 꽤나 많이 돌아다녀보았다. 그러니 다양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먹는 문제는 언제나 내게 아킬레스가 되었다. 먹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구로동에서 처음 외국인 근로자 사역을 할 때에는 멋모르고 먹어야 했다. 젊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함께 먹는 것이 곧 선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함께 먹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먹는 것은 여전히 내게 고통스럽다. 먹어야 한다면 먹어야 한다. 그러나 먹지 않아도 된다면 먹지 않고 싶다.
내가 처음 맛본 외국 음식은 파키스탄 음식이다. 처음 맛본 그 향의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슨 향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향료 냄새는 매우 독특했다. 그 향내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지만 내겐 그 향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들만의 음식에 넣는 향료였으니 그 당시에 그 냄새는 정말 힘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 향료는 거의 그쪽 지방 사람들 모두가 즐겨 먹는 향료였다.

두 번째 음식 체험은 필리핀 음식이다. 당시에는 토요일 저녁이면 심방을 했는데 마침 필리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게 되었다. 미리 심방을 약속해 놓았더니 저녁식사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초대하는 자리는 늘 거절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으니 당연히 그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약속한 토요일 저녁, 그들이 사는 일명 벌집으로 찾아갔다. 여러 필리핀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부엌에서는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면서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어떤 음식일까? 필리핀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면 생선 요리가 많겠지? 아니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큰 접시에 푸짐하게 담겨 나온 음식은 뜻밖에 잡채였다. 분명 잡채인 것으로 기억한다. 우린 함께 기도를 했다.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기도를 했다. 맛있게 먹겠다고도 했다. 고맙고 감격하여 기도를 조금은 길게 한 것 같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그들은 내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맛이 어떠냐고 물어 왔다. 내 눈과 저들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웃고 있었다. 맛이 있다고 말했다. 정말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 웃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속았다는 느낌? 세상에! 내가 먹어본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음식은 한국 잡채 같은 것이었는데 그 안에 들어간 재료는 우리와 사뭇 달랐다. 우리식 잡채는 표고버섯, 양파, 당근, 같은 야채를 볶아 넣고 거기에 약간의 돼지고기를 넣지 않던가. 그 잡채를 생각하고 먹었는데 그들의 잡채는 영 딴판이다. 먼저 돼지내장이 들어갔다. 돼지 간인지 염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장이 잔뜩 들어간 잡채다. 나는 본디 돼지고기도 구별해 먹는 사람이다. 순대국을 먹은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돼지 내장이 들어간 잡채라니...
나는 필리핀 잡채에 두 번이나 속았다. 그 이후에 필리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돼지 잡채를 먹고 배탈이 났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필리핀 음식은 입에 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우리 공동체에서 가끔씩 필리핀 음식을 해서 나에게 가져다 줄때가 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입에 댈 수가 없다. 물론 억지로라도 먹으라면 못먹을 까닭도 없지만 일부러 맛있다고 먹게 되지는 않는다.

세 번째는 이란 음식이다. 우리 공동체 이란 친구들이 사는 경기도 광주의 오포라는 곳에 갔을 때이다. 나는 두고두고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도 토요일 저녁이었다. 오포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있는 곳은 오포의 맨 끝자락이었다. 컨테이너가 그들의 숙소였고 하루 종일 내가 온다고 이란 친구들 중 한 사람은 일도 하지 않고 음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동네에 있는 모든 이란 사람들이 모였다. 함께 나누는 저녁은 감격스러웠다.

이란 음식은 역시 내공이 있었다. 매우 좋은 재료와 정성이 들어갔다. 호두와 석류가 많이 나는 나라가 이란이다. 뿐만 아니라 양고기와 같은 육류와 우유를 발효시킨 음식 등 다양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정성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다. 목회자, 특히 다문화 사역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전세계 음식에 대한 적응력이 빨라야 한다. 이것은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나는 치명적이게도 한식이 아니면 잘 먹지 못하는 음식 장애가 있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단점이다.

네 번째가 중국음식이다. 우리나라 중국 식당에서 먹는 자장면이라면 몰라도 전통 중국식이라면, 사실 나는 중국음식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긴 중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크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음식은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니 상관없지만 오리지널 중국식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잘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중국에 여러 번 간 적이 있다. 동쪽 끝 동북 삼성에서부터 서쪽 끝 신장까지, 그리고 북에서 남까지.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만족스럽게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유일하게 연길시 유경호텔 안에 있던 북한 식당에서 먹어본 온반이라는 음식은 확실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긴 그것은 중국음식이 아닌 북한 음식이었으니 거론할 여지가 없으리라. 거두절미하고 정통 중국 음식을 말한다면 사실 나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얼마 전 우리 공동체근처에서 조선족 선교를 하는 목사님의 초청으로 자양동 중국인 거리에 있는 냉면집에 간 적이 있다. 조선족 음식 특히 연변 냉면이라며 대단히 맛있는 것이라고 소개를 했다. 

정말 중국은 다르다. 냉면이 나오는데 그 그릇이 우리나라 세숫대야보다 못하지 않다. 냉면 그릇에 얼굴을 대고 세수를 한다고 해도 결코 작지 않은, 대륙의 풍모를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큰 그릇이었다. 거기에 냉면이 가득 들어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아내도 놀라고 함께 간 우리교회 최장로님도 놀라는 눈치다. 모두가 웃고 있었지만 느낌은 서로 달랐다. 중국인 김목사님과 함께 오신 분들은 아주 위풍당당하였지만 우리는 곧 주눅이 들어서일까 기가 꺽이고 말았다. 김목사님은 중국에서는 그 냉면도 모자라 육수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쭉 마셔야 양이 찬다고 했다. 그 정도를 마셔야 냉면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고 자랑스레 말을 하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연길냉면은 우리네 메밀로 만든 평안도식도 아니고 감자녹말로 만든 함경도식도 아니었다. 연길 냉면은 녹두 녹말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녹두 냉면은 처음이다. 그 위에 닭고기 뼈까지 으깨어 만든 동그란 고기덩이와 크게 저며진 편육이 충분히 올려져 있었으며 계란도 반개가 아니라 한 개가 통째로 들어있었고 야채도 냉면 속에 가득했다. 육수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고기국물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먹고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쪽은 모두 반도 못먹고 남겼다. 그런데  김목사님과 중국 분들은 국물까지 다 비웠다.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 최장로님은 다시 냉면을 먹게 된다면 우리는 그냥 구의동 서북냉면에서 먹자고 약속을 했다.
며칠 전 다시 중국 김목사님이 전화를 했다. 다시 한 번 연길 냉면 먹고 싶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웃었다. 먹고 싶다고는 말했지만 그냥 한 말이다.

다섯 번째는 몽골 음식이다. 가장 먹을 기회가 많았지만 가장 먹지 못하는 음식이 몽골음식이다. 내가 처음 몽골에 간 것은 1999년 5월 달이었다. 맨 처음 몽골행 비행기를 탔을 때  그 비행기 안에서부터 몽골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냄새에 무척 민감하다. 더욱이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 다음부터 모든 감각은 냄새와 청각으로 집중된다. 특히 음식은 냄새로 분간하며 그 냄새로 내 식성을 결정한다.
몽골 냄새를 아시는가? 몽골 냄새는 한마디로 양고기 냄새와 흙냄새의 결합이다. 특히 양고기 냄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아 조금은 거부감이 있다. 특히 몽골의 양은 먹을 것이 없어 겨우내 말라버린 초원의 풀을 먹고 자랐으니 맛이 있겠는가? 하긴 이건 전적으로 나의 편견이다. 몽골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자신들을 폄하했다고 혼쭐이 날지도 모른다. 그 유목민의 자존심으로 나에게 항변하면 나는 도망해야 한다.

몽골 음식은 전형적인 유목민 음식이다. 유목민 음식이라 함은 양념이 거의 없이 그냥 고기 그 자체만으로 조리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조리한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요리가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조리 방법을 말한다. 특히 헐헉이라는 요리가 있는데 이 요리는 가끔 몽골에 가면 맛보게 되는 음식이다. 

내가 몽골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몽골의 끝없는 초원에서 끝도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조랑말을 타는 기분 때문이다. 누가 그 느낌을 알 수 있을까? 몽골의 북쪽 홉스골 호숫가에서 말을 타던 날은 더없이 행복했다. 태고의 원시 그대로 남아 있는 홉스골, 시베리아 바이칼의 원류이며 서울과 경기도를 합쳐놓은 것만큼의 넓이를 가진 홉스골 호수는 내가 본 이 세상의 자연 중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다. 그곳에서의 2박 3일은 행복 그 자체다. 특히 말을 타고 호숫가를 돌며 맞이하는 그 짧은 하루의 일상은 족히 상상 이상의 행복감을 전해준다.
그리고 더욱 즐거운 것은 헐헉 이라는 양고기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말을 타기 직전에 우리는 한 마리 양을 끌고 와 잡는다. 
우리네 조선후기에 있었던 계급 중 백정이라는 계층이 있다. 이 백정이라는 계층은 고려시대에 들어온 거란족, 여진족 특히 몽골족 이주민을 가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유목민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들 유목민의 후손들은 우리 땅에서 먹고 살만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가축 떼를 끌고 다니며 유목하는 것 외에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었다. 그들이 할 만한 것은 오직 가축을 잡고 가죽을 벗겨내 장사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름 하여 백정이라는 직업을 갖게 해준 것인데 그것이 후기에 들어 천한 계급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다문화는 이미 오래된 문화였으며, 그 문화 속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도 숨어 있다.

양을 잡는 기술이라면 아마도 몽골의 유목민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은 오직 작은 칼 한 자루만으로 양을 잡는다. 초원의 그 한복판에 무슨 물이 있을 것이며 조리할만한 재료가 있을 것인가?
작은칼 한 자루만으로 살아있는 양을 잡는 유목민은 제사장 같다. 성서의 제사장인들 이들보다 더 엄숙할 것이며 거룩할 것인가? 나는 초원에서 양을 잡는 유목민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정말 이들은 제사장의 후예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페니키아 샘족의 후예들이 몽골로 그리고 그 후손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한반도까지 흘러왔다는 그 엄청난 상상력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칼은 정확히 양의 심장에 꽂힌다. 유목민은 작게 그러나 예리하게 심장이 있는 양의 앞가슴을 긋는다. 그리고 그 작은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심장으로 흐르는 동맥을 붙잡는다. 그 순간 유목민은 양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양은 하늘을 본다. 태어나서 처음 바라보는 하늘이다. 단 한 번도 하늘을 보지 못하던 양은 그렇게 마지막 가는 날 끝자락에서 하늘을 본다. 나는 그날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던 어린 양 예수를 떠올렸다. 생뚱맞게도 초원의 양을 잡는 날이면 나는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한 신앙인이 되어 있곤 하였다.

유목민은 확실히 제사장의 후예인 것 같다. 그들은 피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양을 잡는다. 피를 땅에 흘리는 제사장은 제사장이 아닌 것처럼 피를 흘리는 유목민은 유목민이 아니다. 그들은 물을 사용하지 않고 양을 잡고 요리를 한다. 먼저 초원의 길가에서 작은 조약돌 같은 것들을 주워 그 돌들을 불에 달구기 시작한다. 한참 달구어진 돌들은 이미 잡은 양고기 사이사이에 들어간다. 우리네 압력밥솥 같은 큰 통에 양고기 한 켜, 달구어진 조약돌 한 켜, 다시 양고기 한 켜, 그리고 다시 달구어진 돌들. 이렇게 겹겹이 달구어진 돌과 양고기가 들어간 후 닫혀진 찜통은 모닥불 위에서 또 달구어진다. 이것이 전부다. 속에서는 달구어진 돌들이, 밖에서는 초원의 모닥불이 고기를 익힌다. 서너 시간 배가 고파 말 타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 쯤이면 고기는 익어있고 고기냄새를 쫒아 하늘에서는 독수리 떼가 날개 짓을 하며 빙빙 돌고 있다.

둘러앉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홀로 이방인처럼 약간 밖으로 나와 앉는다. 왜냐하면 나는 양고기를 싫어하니까. 처음에는 먹어 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먹지 않았다. 자꾸만 쓸쓸이 죽어가던 양의 그 마지막 눈초리가 기억나서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양의 초연한 죽음을 생각하면 그냥 금식하는 것이 맞다 싶어서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나는 양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음식은 인도다. 나는 여기서 자신감을 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일관성이 없다. 왜 인도 음식은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한국에서는 인도 음식을 먹어보지 않았다. 그럴 기회는 있었지만 그냥 먹지 않았다. 선입관 때문이다. 그러다 우리 공동체 인도팀 리더인 판가즈와 함께 인도 펀잡에 가게 되었다. 판가즈의 결혼과 신학 공부를 부모님께 허락받기 위한 여정이었다.
판가즈, 그의 여친인 혜정, 권목사 그리고 아내와 내가 함께한 여정이다. 일주일간의 일정을 위하여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그중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고추장, 김치, 라면, 김 등등 갖가지 한국 먹거리를 준비해 갔다. 인도는 정말 멋진 나라다. 그러나 먹는 문제는 다르다. 아무리 멋져도 먹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이것이 나의 한계다. 

판가즈의 집은 펀잡의 주도인 찬드갈에 있었다. 그의 집은 찬드갈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의 부모님을 비롯한 온 가족은 인도의 계급 중 가장 높은 브라만이었다. 인도의 기독교가 이미 2,000여년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기독교가 브라만의 계급구조를 깨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의 계급구조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만큼 대단한 벽이다. 특히 인도의 기독교인은 대부분이 가장 낮은 계급이라는 달릿, 즉 불가촉 천민이다. 인도의 기독교인들 중 약 60%이상이 그들이라고 하니 인도의 기독교가 브라만에 침투하거나 그들의 계급구조를 깨지 못한 이유이다. 그런데 판가즈네 집은 브라만이었다. 가장 높은 계급이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가 인텔리이거나 혹은 그 지역사회의 리더들이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강직하고 똑똑했으며 마지막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어머니였다. 아마도 판가즈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였던 것 같다. 가정적이며 부드럽고 특히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다. 
나는 첫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준비해간 한국 음식을 내놓지 않았다. 그만큼 인도 음식이 좋았다. 좋은 것이 아니라 탁월했다. 이것도 편견이었나? 아니다. 그 이유는 인도 음식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카레였다. 그러나 나는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카레는 가장 맛보기 어려운 별미 중 별미였다. 그러던 카레가 어느 날 별로 내키지 않는 음식중 하나가 되었다. 배가 부른 거다. 특히 우리 두 아들 영규와 영길이는 나보다 먼저 인도를 다녀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인도 음식은 커리 밖에 없다고 하면서 거의 매일 커리를 먹고 왔다고 했었다. 그러니 내가 아는 카레 혹은 커리는 이미 내 안중에 없다. 나는 한국 음식으로만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도를 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판가즈네 집의 모든 식사는 아버지가 준비했다. 판가즈의 여동생인 예쁜 애니도 똑똑한 어머니도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검은 설탕이 들어간 커피우유 한잔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리고 청포도는 왜 그렇게 싱싱하고 맛이 좋던지. 부엌에서는 로띠가 익는 냄새가 그윽하다. 잘 차려진 아침상 위에는 프론타라는 인도음식이 나왔다. 양파와 당근, 그리고 여러가지 것들이 어우러진 특히 인도의 치즈가 조금 들어간 것도 같고 구웠는지 튀겼는지 그 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분명한 기억은 정말 맛이 좋았다는 것이다. 나는 놀랐다. 내 편견에도 예외는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인도 음식에 꽂혔다. 어디서든 인도음식이라면 좋았다.
강남의 김장로님 빌딩 안에 있는 인도 음식점도 좋았고, 극동방송 근처의 인도 음식점도 좋다. 어디서든 인도 음식은 다 좋다. 이 무슨 일관성 없는 예외이며 편견 중 편견이란 말인가? 나는 할 말이 없다. 나야 말로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니까. 음식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지만 정말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내 한계와 편견 그리고 입맛의 그 요사스러움 그리고 그 변덕스러움까지.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거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 필요하고 맛있는 거다.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이 문제일 뿐. 음식처럼 세상도 넓고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너무 좁다. 열린 삶은 여전히 멀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7-01 11:18:23 노마드톡에서 복사 됨] http://nasom16.cafe24.com/bbs/board.php?bo_table=B02&wr_id=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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