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근 목사와 함께 떠나는 선교 여행 / 네팔편(1)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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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유해근 목사와 함께 떠나는 선교 여행 / 네팔편(1)

 


<네팔과 나>

2013년 12월 5일, 네팔로 향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 시절 네팔을 기억한다. 그때에 나는 젊었었다. 너무 젊어 분노했고 스스로 절제하지 못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다. 삶과 죽음의 자리에서 나는 울고 그래서 처절했던 시절이다. 

내가 네팔인들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8월이다. 당시 나는 구로동에서 외국인 노동자 선교를 시작했다. 너무도 생소한 사역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처음 시작한 사역이다. 무모하리만큼 무지했었다.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없을 만큼 그 일에 몰입했고 그래서 더 아픈 기억뿐이다. 

그 당시 어느 날 네팔인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네팔 사람 한명이 공장에서 잠을 자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그들에게서 고통스러움 자체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절대고통이라던가? 그랬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친구의 영정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침묵의 고통이다. 아니 고통이 지나치면 침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장에서 잠을 자던 네팔인 친구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죽어 있더라는 것이 그들이 아는 전부였지만 공장에서는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책임이 없노라고 먼저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네팔인 친구들은 어떻게 할지를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내 눈만 쳐다보면서 도와달라는 간절함이 눈빛에 가득하였다. 돈도 없고 찾아올 가족도 여기엔 없었다. 주검으로 누워있는 자는 누구이기에 한국인인 내게 도와달라고 애절하게 누워있는가. 네팔의 가족들은 아들의 시신을 네팔까지 수송해 달라고 했다 한다. 그러려면 시신을 특수 처리하여 알미늄관에 넣고 냉동한 상태로 보내야 한다. 그 비용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 여기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의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러야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공장에서 일말의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며 공장주를 설득하여야 했다. 최소한의 비용이라도 부담하라고 했더니 열흘인가를 지나 공장주가 오백만원을 보내왔다. 그 돈이 전부였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여 저녁이면 시신이 보관된 그 지하실에 가서 밤을 지냈다. 늦은 밤이면 네팔인 친구 몇 사람이 찾아와 함께 밤을 새우곤 하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밤마다 함께 그곳을 지켰다. 누구도 그 시신을 가지고 갈 사람이 없었음에도 우리는 그 시신을 무슨 보물처럼 지키고 앉아 밤을 새웠다. 그것도 거의 열흘쯤 그렇게 함께 잠을 자고 지낸 것이다. 
그리고 공장주로부터 받은 오백만원을 고향의 집에 보내고 우리는 장례를 준비했다. 먼저 시신을 화장하기로 하고 성남의 화장장을 예약했다. 거기까지 시신을 옮기기 위하여 나는 적십자사에 부탁을 했다. 작은 영구차를 무료로 빌린 것이다. 그해 8월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온 것 같다. 그날도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네팔인 친구 몇 사람이 찾아와 함께 시신을 작은 관에 옮기고 적십자사에서 빌린 영구차에 실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성남 화장장이었다. 당시 성남의 화장터는 허름했었다. 논두렁 사이에 있던 화장터는 비가오니 더욱 처연했다. 우리가 싣고 간 시신이 내려지고 몇 시간 후에 우리에게 들려진 것은 작은 유골함이었다. 가벼운 유골함을 가슴에 앉고 보니 왜 그리 마음이 아프던지...  그날 나는 내 가슴에 그 작은 유골함을 안고 비가 내리는 성남 화장터 앞 논두렁을 걸어 내려오면서 많이도  울었다. 다른 네팔인들은 울지 않는데 나만 그렇게 우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왠지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며칠 후 그 유골함을 네팔의 가족에게 보내고 나는 그들을 잊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그 친구 아니 죽은 네팔인의 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갔다. 
그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40명의 네팔인들이 고향집으로 보낸 돈이 우리나라 검찰에 압수된 것이었다. 그들은 큰일이 났다며 또 도와달라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은행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집들이 히말라야 어느 산골짜기에 있었는지 그들의 고향에는 은행이 없었고 그래서 한국에서 번 돈은 모두 송금 브로커를 통해 그 돈을   고향에 보내고 있었다. 140명의 네팔인들은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달러로 바꾸어 김포공항을 거쳐 홍콩으로 나가는 송금 브로커에게 맡겼었던 것이다. 그 돈은 약 2억원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출입국관리소가 호구인가? 아니다. 몇 번은 가능했는지 몰라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것이 아닌가. 브로커는 공항에서 붙잡혔고 그는 곧바로 외국환 관리법으로 구속되었으며 그가 가지고 나가려던 돈은 모두 검찰에 압수 보관된 것이다. 
그래서 140명의 네팔인들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잃어버린 돈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어떻게 그 돈을 찾을 것인가! 나는 곧바로 140명의 네팔인들에게 자신들의 이름과 맡긴 돈의 액수 등을 적어 연명을 하여 가지고 오라고 했다.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맡긴 돈의 액수 등이 가득히 쓰여진 종이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내가 찾아간 곳은 검찰청이다. 내가 검찰청에 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이것은 분명 현실이었다. 담당 검사를 찾아가니 정말 분위기가 그랬다. 검사의 모습은 냉정했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내 이름이 적힌 명함 한 장을 검사에게 내밀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님, 저는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목사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네팔인 노동자들의 돈을 찾으러 왔습니다. 검사님이 외국환 관리법으로 구속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돈은 네팔인 노동자들의 돈입니다. 그 돈은 네팔인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돈입니다. 그들은 은행으로 송금할 길이 없어 브로커를 통해 돈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돈을 돌려주십시오. 그 돈은 네팔인들의 것이며 지금 그들의 가족이 그 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 돈이 우리나라의 국고에 몰수 된다면 그들은 절망할 것입니다. 돌려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응수하지 않던 검사는 내게 묻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나는 그때 네팔인들이 연명하고 작성한 것을 검사에게 내밀었다. 검사는 한참이나 그 작은 종이 한 장을 바라보더니 얼마쯤 지났을까 직원을 부르더니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그리고 자그마치 미국 달러로 환전된 2억원의 돈 가방을 내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닌가! 검사는 나를 어떻게 믿고 그 돈을 주었는지 지금도 미스테리하다. 검사는 왜 내게 그 돈을 주었을까?

미달러로 2억이 넘는 돈 가방을 등에 지고 검찰청 계단을 내려오던 때가 기억난다. 가슴이 뛰었다. 정말 감사하고 기뻤다. 돈을 되돌려 주면서 나는 행복했고 그 돈을 다시 받아든 네팔인들은 내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리는 그날 너무 좋았었다. 그랬다. 정말 행복했다. 나는 내 사역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 후로 네팔인들은 더욱 많이 나를 찾아왔고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주일이면 만나 예배를 드렸고 함께 밥을 먹었다. 닭튀김을 유난히 좋아하던 그들은 내게 히말라야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고 그들의 나라를 소개했다. 나는 언젠가는 그들의 나라 네팔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지금 네팔행 비행기에 올라 그 기억을 더듬고 있다. 거의 20년 만에 네팔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꼭 한번 가고 싶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 지금 그렇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구릉, 나바라지, 라마, 하리와 그의 친구들... 
네팔 사람들은 유난히 착하고 온순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한국말을 빨리 배웠고 체력이 좋아 어느 곳에서 일을 하던 한국인 사장님들은 네팔인들을 좋아했다.  
언젠가 외국인들을 데리고 설악산에 간적이 있었다. 울산바위까지 다녀오라고 말을 하고 나는 설악산 밑 광장에 앉아 있었다. 네팔인들은 울산바위까지 한달음에 다녀왔다. 두서너 시간이 걸릴 그 험하고 먼 곳을 네팔인들은 자기네 집 앞산 다녀오듯 쉽게 갔다가 온 것이다. 그들은 5000m 이상이 되어야 산(mountain)이라고 부르지 그 이하는 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하의 산은 언덕 즉 힐(hill)이라고도 했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렇게 말하던 네팔인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보고 싶다. 잊어버린 얼굴들이었는데 갑자기 그들의 웃는 얼굴이 생각난다. 약 7시간을 걸려 네팔의 카트만두(Kathmandu)에 도착했다. 네팔이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그들과 약속했던 그들의 나라 네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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