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만남" 기고 간증문< 고난이 남겨준 은혜 >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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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영락교회 "만남" 기고 간증문< 고난이 남겨준 은혜 >


   역사와 운명의 만남
필자는 1987년 2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26세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어 전방부대 군목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아내는 중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었으며 군을 전역할 당시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천방지축으로 살았다. 고민은 많았지만 교만했고, 생각은 많았지만 목표가 뚜렷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차별된 어떤 목회 또는 공부에 대한 열망만이 있었다. 
필자가 군을 전역한 때는 1990년, 세계는 소련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냉전구도가 깨지고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이 흩어지고 모여드는 이주민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역사와 운명의 조우였을까?

   나그네 목회와 고난
구로공단에서의 외국인 노동자 사역은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2년 겨울 어느 날 필자는 뜻하지 않은 부르심으로 구로공단에 들어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선교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느끼고 그대로 그곳에 찾아 들어간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은 고단하고 힘들었다. 그들을 위한 사역자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고단한 일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욕설도 들어야 했다. 그 당시 필자를 힘들게 한 것은 외국인 나그네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내 삶에 큰 위로와 힘이었다. 오히려 필자와 함께 사역을 하는 한국인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더 큰 아픔을 주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행동했다. 필자에게 그런 행동은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오면서 어느 날 필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가 발생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시력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절망하였다.
더욱이 작은 아들이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발견되면서 우리 부부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아내는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점점 분노와 절망의 그늘에 사로잡혀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눈물과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회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1995년 2월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집을 나와 죽음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죽음 앞에서 만난 예수님
그해 2월의 강원도 묵호항은 정말 추웠다. 지금은 동해시로 바뀐 묵호항에서 나는 죽음을 결심한 채 묵호항의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새벽같이 바다로 향했다. 죽으러 나가기 위함이다. 죽음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인지 몰랐다. 목사인 내게 자살의 결심은 이미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다. 그때는 정말 화가 나고 절망했다. 하나님이 나와 내 가정을 버리셨다는 그 아픔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볼 수 없었다. 내 장애와 아들의 장애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므로...
죽으러 나가는 내게도 그날 새벽의 바닷바람은 왜 그렇게 춥게 느껴지던지!
묵호항 포구의 한적한 곳에서는 자그마한 모닥불이 피어 있었다. 몇몇 노파들은 추위에 떨며 항구로 들어오는 고깃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추위를 느끼며 점점 그 모닥불로 다가섰던 것은 우연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가선 모닥불 주변의 노파들 틈에서 나는 뜻밖의 얼굴을 보았다. 그분은 예수님이셨다. 나에게 왜 여기에 왔느냐 물으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죽으러 왔다는 내 대답에 한없이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그 눈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내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꾸짖기도 하시고 위로해 주시기도 했다. 죽지 말고 살라하시는 주님의 꾸중과 위로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그만 그 추운 묵호항의 모닥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많이 울었던 기억이 없을 정도다. 죽음 대신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면서 나의 내면은 어느새 설레임과 희망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그 길로 서울로 돌아온 나는 구로동에서 성수동으로 사역지를 옮겼고 나그네들과 함께 광야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포기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행복했고 감사했다. 정말 모든 것이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제는 감사할 수 있어요
필자는 지금 1급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내 아들은 지적 장애2급이다. 우리 집에는 그렇게 장애를 가진 아빠와 아들이 살고 있다. 여전히 필자의 사역은 나그네를 섬기는 일이다. 우리안의 나그네들은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재한몽골학교와 나섬공동체가 하는 일이 그런 거다. 누가 그들을 친구로 삼을 것이며 존재감 없는 이들을 안아줄 것인가?
필자의 인생에 주어진 고난이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예수께서 이 땅에 가장 낮은 자로 오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면 큰 도를 깨달은 것인가? 아니다. 나는 몸으로 믿음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육신’이란 몸으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해 주는 말이다. 몸이 아프니 가슴도 아프다. 내 몸이 아프니 당신 몸의 아픔도 느껴진다. 공감의 삶이 필자의 사역의 핵심 가치다. 아픈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며 그 공감은 내가 아파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내가 아프니 아픈 자들이 보인다. 내 육신의 눈은 사라졌지만 마음의 눈은 더 크게 열려 어두운 세상이 보인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며,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드디어 작은 믿음의 줄을 잡았다. 내가 볼 수 없게 되면서 나에게는 뜻밖의 은혜가 주어졌다. 내가 볼 수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았던 내 과거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은 내가 육신의 눈을 잃었음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아들과 내 육신에 주어진 장애는 선물이다. 고난은 은혜를 위한 작은 통과의례일 뿐 그것이 우리를 죽일 수 없다.
나섬과 재한몽골학교는 오직 은혜로만 살기로 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감사할 수 있다. 감사는 내 능력이 충만하여 누구와도 경쟁해 이길 수 있는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내가 약해졌음에도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은혜로 살아감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미 필자는 장애인이 되었고 필자의 아들 또한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나와 내 아들을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다. 전에는 내 육신의 자랑거리가 많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다 사라졌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나는 과거의 나를 버려야 했다. 이제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 고백하면서 새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더 자유하고, 더 감사하며, 더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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