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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톡109 이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대상


이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선교의 대상

요즘 들어 필자에게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무슬림들과 할랄 음식에 관계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20만 명의 무슬림들이 들어와 있다고 하며, 그들 중 상당수는 이슬람의 선교사일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슬람으로 개종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도 사실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분명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더욱이 정부가 전북 익산에 만들고 있다는 할랄 음식 단지에 대한 일 등은 그런 우려를 넘어 불안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계의 목회자들을 비롯한 이슬람 전문가라는 이들의 이슬람 세력과 할랄 음식단지에 대한 공포심 조장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과연 무슬림들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오는 현상이 두려움인가? 할랄 음식이 우리나라에 이슬람의 세력이 들어오는 단초가 되고 그것이 결국 기독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위기인가?
만약 그 논리가 맞는다면 결국 그들이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나라에는 아예 무슬림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막자는 말인지, 아니면 이슬람 세력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테러리스트로 단정하고 집중적으로 경계하거나 관리하자는 말인지 듣고 싶다. 뿐만아니라 할랄 단지를 만들지 말라는 청원이 계속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지만 과연 정말 교회가 말하는 할랄 단지가 그렇게 익산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위협이 될 것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다. ‘이슬람’ 그러니까 그 종교를 믿는 무슬림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로 보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아가 무슬림과 기독교 선교가 과연 이렇게 충돌하고 대치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슬람을 상대로 선교를 할 것인가? 또한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은 정작 오늘날 교회와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가면서 우리는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에 대하여 선교적 관점이 아니라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슬람은 본디 평화의 종교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테러나 전쟁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 과격한 종파주의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는 이슬람 전체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근본주의는 모두 악이다. 양보와 화해를 말하지 않는 종교는 악인 것이다. 이슬람은 물론이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였는가? 미국의 부시정권이 있지도 않은 대량무기를 빌미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가? 이것이 선인가? 이런 식의 전쟁이 선인가? 아니다. 이건 선이 아니라 악이다. 사람을 죽이는 그 모든 전쟁과 테러의 논리는 악이다.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 이슬람의 테러는 시아파가 아니라 이슬람 수니파의 저질적 논리와 종파주의 때문이다. 이슬람 수니파가 세상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독선과 광기가 만든 것이 테러다. 우리 공동체에는 많은 이슬람의 무슬림들이 찾아온다. 나는 20여년 넘게 그들을 만나면서 왜 이들을 테러리스트처럼 취급하여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이는 편견이며 또 다른 차별이다.
또 하나는 할랄 단지와 관계된 것이다. 과연 할랄 단지가 우리나라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는 단초인가? 그리고 과연 그렇게 할랄 음식이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부가가치가 있는 사업인가 하는 점이다. 글쎄, 정말 그렇다면 문제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오버할 것은 아니라 본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할랄 단지를 만들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도 웃긴다. 국내의 무슬림들이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할랄 음식이 그렇게나 많이 먹게 되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미 전세계에 할랄 음식은 차고 넘쳐난다. 굳이 우리나라에까지 그 할랄 음식을 수입할 이유가 별로 없다.
돈을 크게 벌지도 못하면서 사회와 교회에 큰 걱정을 끼치는 그런 정책과 사업은 누구의 발상인가? 또한 그 할랄 음식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논리도 지나친 공포심 조장이다.
중요한 것은 무슬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가데스바네아의 열두 정탐꾼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음에도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한다.
정탐꾼들 중 열 명은 가나안의 아낙 자손들을 보고서 그들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말한다. 그리고는 그들에 비하여 우리는 너무 작아 메뚜기 같다고 말한다.
이 보고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틀렸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두려움이다. 그렇다, 무슬림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이유는 선교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악한 세력과 영적 전쟁을 통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의 정탐꾼은 달랐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그들이다. 이 두 사람은 가나안을 보니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며 그곳 거민들은 우리의 밥이라 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니 누구의 보고가 맞는가?
무슬림은 선교의 대상이다. 만약 이슬람 세력이 그렇게 많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다면 그들은 선교의 대상이니 정말 좋은 선교의 기회라 말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선교를 위하여 이슬람 지역으로 보내지는 선교사들을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선교사들을 이슬람 지역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써가면서 보내려 하는가? 
그리고 그 효과와 열매가 그렇게 의미 있게 맺어지고 있다고 믿는가? 우리는 너무 이중적이다. 선교를 말하는 교회가 선교의 대상을 두려움과 공포, 나아가 저주스러운 존재들로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의 선교와 믿음은 허구다.
뿐만아니라 그들을 선교하려면 전쟁과 테러로 대응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다. 하지만 우리의 선교전략은 오직 사랑이다. 사랑으로 안고 화해하며 품어내는 것이 선교다.
무슬림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더 이상 이슬람 공포증을 확대재생산하지 말자. 오히려 많이 오면 올수록 나아가서 선교하는 비용과 수고를 덜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자.
왜 우리는 우리 안의 무슬림들을 선교하려 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렇게 선교를 말하면서 정작 선교의 기회가 주어지니,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요, 테러리스트가 몰려온다면서 공포를 조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싸워서 이기는 영적 전쟁을 말하면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영적 전쟁과 선교가 너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순이었다는 의미다. 우리의 믿음과 영적 상태가 무척이나 자신 없다는 반증이다. ‘그래 와라! 한 판 붙어보자!’ 하며 선교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야 하는 교회와 성도가 너무도 연약하다. 정말 안타까운 우리의 이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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