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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필리핀 행복학교 5 나섬의 선교는 멈추지 않는다

나섬의 선교는 멈추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위기의 한 가운데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개구리가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속에서 조금씩 죽어가듯이 한국교회는 지금 그렇게 위기 속에서 소멸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회의 위기는 곧바로 선교의 위기를 불러온다. 선교가 위기임은 선교지에 나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선교사들마다 아우성이다. 얼마 전 내 동기 중 우크라이나 선교사 한 분이 나섬을 방문하였다. 오랫동안 선교사로서 살아온 사람이니 그만큼 선교지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선교사들의 경우만 하여도 많은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후원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지 못하게 되니 더 이상 선교지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쇠락이 선교지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불확실한 미래가 선교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교의 시대는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인가?
내 동기 선교사도 선교비가 끊기어 몇 개월째 선교비를 받지 못한 채 선교를 하고 있다 한다. 얼마 전까지 지원되던 선교비가 작년 말로 끝이 나면서 선교비 없이 몇 개월째 사역을 하고 있다 했다. 선교비 없이 어떻게 사느냐 물으니 지금까지는 조금 있는 것으로 충당하였으나 앞으로가 문제라 했다. 그래서 선교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들어왔노라 했다. 해답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암울하고 불투명하다. 선교의 시대는 더 이상 한국교회에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일까?

교회와 선교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존한다. 교회의 시대가 열리면 선교가 활성화되었다. 반대로 교회의 쇠퇴는 더 이상 선교를 할 수 없게 한다. 그러니까 교회의 상황이 선교의 상황과 비례하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교회의 상황이 불확실을 넘어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세계 2위의 선교국가라 자부하던 한국교회에서 선교의 사명은 더 이상 비전이 아니다. 절반 이상의 선교사가 돌아왔다는 보도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현재 선교의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다.
선교의 위기는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섬은, 위기가 곧 기회라는 속설을 현실로 이루어가려 한다. 선교의 위기는 맞다. 그러나 모든 선교가 다 위기인 것은 아니다. 경제에서도 한국 경제가 위기라고 하지만 때로 어떤 기업은 기회를 잡고 더 성장하는 경우도 보았다. 위기는 분명 기회임을 믿어야 한다.
오히려 위기 가운데 기회가 더 있다. 교회와 선교가 위기를 맞이한 이 때를 나섬이 기회라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선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패러다임을 바꾸어야한다고  주장했던 바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장이 곧 선교의 성장이라는 등식에 동의하지 않고 새롭고 창조적인 선교의 패러다임을 만들려 했던 나섬의 수고가 이제야 그 열매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나섬은 작다. 아니 작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아짐을 선택한 공동체다. 나섬의 선교지는 한국이다. 세계선교의 시작은 이제 한국의 중심부라는 서울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해왔다. 나는 '동대문이 땅끝'이라는 현판을 걸고 오직 한 길만을 개척해왔다. 동대문에는 전세계가 있다. 동대문은 상징이다. 200만 명의 이주민 시대가 열렸다. 이주민은 앞으로 더 많이 들어올 것이며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그런데 왜 선교를 밖으로 나가서만 하려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었다. 선교사들에게도 하나만 보지 말라고 했다. 교회들을 향하여는 더 이상 과시적이며 구호만의 거품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미움도 받았을 거다. 선교사들로부터 아니 교회로부터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낙인이 찍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이며 경제적인 선교의 길이 여기 있음을 확신하고 있을진대 어떻게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할 것인가?
그 경고는 현실이 되고 있다. 교회의 상황이 선교의 상황을 규정하는 종속의 선교 패러다임은  바뀌어야 하며 이제 그 시점이 된 것이다. 문제는 훈련되지 않은 선교사와 한국교회다. 고난 속에서도 선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훈련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광야의 삶을 살아본 자에게만 광야의 시대가 의미있는 것처럼 지금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한 이들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도 변화를 거부하려는 무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와 패러다임에 신속히 적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두 번째, 위기를 기회로 보는 이유는 선교에 대한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섬은 전통적인 선교의 전략을 의심했다. 과연 지금의 선교 전략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는 선교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나섬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경제적 자립을 고민하고 도전해왔다. 누군가의 후원이 없이 나섬의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언제까지 구걸하듯 후원과 도움으로 선교를 하여야 하는가는 내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갖게 하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서 아굴라와 브루스길라를 만나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를 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들의 텐트 메이커 사역은 계속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었다며 당당하게 자존감을 갖고 사역을 했다. 바울의 선교모델을 왜 한국교회는 도입하려 하지 않는가? 바울처럼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선교가 왜 불가능한지 의심스럽다. 바울의 선교 모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그 모델을 굳이 외면하고 평가절하 했을까? 교회와 선교사들의 강박과 이중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교사는 선교에만 전념하라는 식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경제적 문제를 선교에 접목시키지 않은 이유일 게다. 더구나 물질에 대한 이중성과 강박의 결과 우리는 '경제와 선교'라는 큰 명제를 무시한 것이다. 선교는 경제와 관계가 있다. 선교사가 먹고 살면서 선교하여야 하고 선교지의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살려내는 선교를 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적 경제다. 오늘 우리의 위기는 선교적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외면한 결과다. 선교적 경제와 선교적 삶은 공생의 관계다. 바울의 선교를 새롭게 해석하여야 한다.
나섬의 선교적 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2007년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기업의 모델을 도입했다. 다문화 이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의 시작이었다. 커피 바리스타 교육과 카페운영, 원두유통과 공정무역을 통한 생두 수입, 이주자들을 활용한 다문화 체험학습과 강사지원, 재활용 가게인 사랑나눔가게의 운영 등 우리는 사회적 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지속가능한 선교를 위한 자립경제의 모델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많은 오해를 받으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도 당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편견과 고정관념과 익숙함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의 시선 같은 것에는 결코 흔들릴 수 없었다.
2007년부터 개발한 양평의 다문화생태마을에서는 블루베리를 키우고, 학교 옥상에는 햇빛발전소를 세워 그 전기로 버섯을 키우며 제과제빵을 가르치고 더 큰 꿈을 꾼다. 아차산의 꽃들에게서 벌들이 꿀을 따다 주는 환상을 현실로 만들었으며, 그 도전은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교적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은 선교적 자존감은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위기가 곧 선교의 위기라는 도미노를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다.  
나섬은 자립한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선교의 길이다. 어떤 상황과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분명한 전략은 스스로 선교적 자립을 이룩하는 것뿐이다. 누가 어떤 오해를 하고 아무리 비난해도 우리의 갈 길을 막지는 못한다. 이 선택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으로 우리는 간다. 끝까지 그 길을 간다.
한국교회의 태반이 문을 닫아도 하나님 나라의 선교마저 문을 닫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교가 교회에서 자유하여야 선교다. 선교가 교회의 상황과 목회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아니라 세상 교회의 자기 전시적 선교일 뿐이다. 나섬은 그런 일시적이며 무계획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한 선교를 거부한다. 그래서 바울의 자립선교 모델을 도입한다. 나아가 선교적 경제와 선교적 기업을 일으켜야 한다. 사회적 기업을 넘어 선교적 기업과 선교적 금융까지 포함한 새로운 선교투자를 위한 선교펀드도 조성하여야 한다. 그것이 십일조 나눔재단의 설립이다.
한국교회 십일조 나눔재단은 선교와 구제를 위한 펀드다. 새로운 선교적 금융을 일으켜 보자는 취지다. 뿐만아니라 교회의 십일조를 포함한 새로운 헌금문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민감한 십일조와 헌금을 미래 선교와 새로운 한국교회 만들기라는 차원에서 의제로 설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교회에서 교인수와 헌금은 비례한다. 목회자의 교인수 늘리기 목회는 그 교인수와 헌금의 비례라는 공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인의 수평이동도 얼마든지 한국교회 목회에서는 무죄다. 왜냐하면 교인수가 곧 헌금의 액수로 드러나며 그 헌금의 크기가 곧 목회자의 성공여부를 가르고 그 성공여부는 다시 종교권력으로 이동한다. 교회와 목회자에게 교인수 늘리기 경쟁은 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목회자는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붙든지 한국교회 내에서는 아웃 사이더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
성공한 목회자의 조건은 교인수와 헌금의 크기와 비례한다. 헌금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보다 앞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리는 조건임으로 그것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겠다.

오늘 한국교회 십일조와 헌금의 문화는 건강한가를 물어야 한다. 의심하고 고민하면서 헌금하여야 한다. 물질 안에 마음이 있다는 말 때문에 무조건 헌금하고 그 헌금의 흐름에는 관심이 없다면 결코 헌금의 의미를 모르는 성도다.
십일조를 자기 교회에 해야 한다는 논리는 없다. 성서 그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다. 잘 사용되어지는 헌금만이 진정한 헌금이다. 교회 안에 내는 헌금이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이어야 한다. 그 헌금은 구제와 선교를 위한 것이다.
십일조의 문화를 바꾸면 한국교회 성장의 논리는 사라진다. 큰 교회가 되려는 목적이 사라진다면 교회는 건강하고 균형 있게 성장할 것이다. 교회가 서로 경쟁하려는 모습은 사라지고 협력하며 하나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이다.

나섬은 과감하고 래디컬하게 십일조 나눔운동을 제안한다. 결코 나섬이 주도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십일조 나눔재단은 한국교회의 헌금 전문가들이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투명하게 운영하면 된다. 각 교회와 선교지, 그리고 구제처에서는 십일조 나눔재단에 필요한 재정을 요구하는 제안서를 제출하고 그 제안서를 심의하는 전문가 그룹이 있어 공정하게 심사하고 결정하면 될 것이다.
모두에게 의미있는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 십일조는 어느 교회의 독점물이 아니다. 독점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다. 독점되어져야 할 아무런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다. 어느 교회가 그 모든 것을 독점하려 하는 것은 욕망이며 죄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렇게 망가지는 이유다. 교회 개혁의 가장 필요한 부분이 십일조와 헌금문화의 개선이다. 그 문화를 바꾸는 대담한 결단을 하는 성도가 필요하다.

세 번째, 한국교회 선교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만드는 방법은 나그네를 순례자로 다시 순례자를 역파송의 선교사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역파송 선교사는 돌아올 수 없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돌아올 곳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역파송 선교사들에게 집은 그들의 민족이며 공동체다. 돌아올 수 없는 선교를 하여야 한다. 돌아가면 그곳이 집이다. 나그네가 순례자가되어 집으로 돌아간다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 위기는 한국인 선교사들에게만 있을 뿐 역파송된 현지인 선교사들에게는 위기가 아니다. 위기가 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면 선교가 위기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위기는 교회와 선교사들 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역파송은 결국 독립된 선교다. 독립할 수 없는 역파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역파송 선교사를 키우고 검증하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이기는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역파송은 지속가능한 선교를 위한 대담한 결단이다. 역파송 선교사는 독립된 선교를 결단하고 출발한다. 선교의 위기를 말할 이유가 없도록 처음부터 역파송은 경제적 자립의 조건으로만 시작한다.

나섬의 선교는 끝이 없다. 리더십이 변해도 나섬은 세계로 간다. 미션 하이웨이를 선포한 이유와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선교를 더 추가하면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시니어 은퇴자와의 융합선교다. 자신 있게 융합선교라 부르는 이유는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는 선교이기 때문이다. 기하급수적 선교다. 산술적 덧셈의 선교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이며 복합적인 선교이기에 융합선교라 부르는 것이다.
나섬의 선교는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 시스템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누가 리더가 되더라도, 리더가 부재중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교회와 목회 환경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멈출 수 없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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