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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톡143 지금은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때다

     신앙은 이데올로기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한국교회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념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은 보수를 넘어 수구, 친미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철저히 이승만 정권 이래 친일파와 독재정권의 하수인 그리고 개발독재시대의 첨병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독재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를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선 역사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수구 반동의 첨병처럼 느껴지도록 행동하고 말해왔다. 선거 때마다 특히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우리 교회는 수구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당에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설교에서부터 앞장선 목사들이 있었다. 대형교회가 그 선봉의 역할을 자임해 왔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박근혜 정권이 태어날 때도 우리 교회는 그녀가 아니면 마치 대한민국이 망할 것처럼 그들을 지지해 왔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는 박대통령을 페르시아의 고레스 같은 왕이라 했을 만큼 한결 같이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세월호 가족보다는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며 너도나도 그녀를 위로하는데 급급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서의 말씀을 우리는 대통령과 함께 우는 교회로 해석하고 정권을 위한 교회가 되려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역사보다는 당장의 권력과 이해관계가 더 두려웠고 중요했던 것이다. 교회는 무조건 반공과 친미와 수구 기득권의 상징처럼 되어 가면서 우리의 신앙과 고백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되었으며 점점 깊은 수렁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예언자들이 살아있었다면 과연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했을까 생각하면 너무도 부끄럽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것은 신앙이 현실적 기복과 관계되면서부터다. 기독교 신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하면서 당장의 축복을 얻는 길이라면 그것이 친일이고 독재이며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인 일일지라도 용인하려는 천박한 기독교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너무도 가난하고 힘이 들었음으로 우리는 성장과 성공이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등식의 신앙을 가졌다. 그 순간을 천재적 종교가들인 몇몇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기막히게 꿰뚫었으며 그렇게 교회는 성장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된 것이다. 성장이 곧 성공이고 그런 성공이야말로 축복의 상징이라고 가르치면서 우리는 모두 성공에 미쳤고 성장에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무조건 잘사는 것이 예수 잘 믿는 징표이며 어떻게 하든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부자가 되는 것에 환장한 우리 모두는 이리저리 날뛰는 망둥이처럼 그리로 달려갔다. 그래서 수만이 아니라 수십 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만들어졌고 그 힘은 또 새로운 종교권력을 이루면서 정치와 종교는 한 몸이 되었다. 그래서 정권은 연장되고 그 정권이 어떤 정권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나만 잘살게 해주고 우리 교회의 기득권만 보호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목회자는 청와대에 가끔씩 불려가 밥을 먹고 조찬기도회의 설교자가 되면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이런 분이라며 자랑하기에 급급했고, 어리석은 우리는 그런 교회라면 축복이 흘러넘치는 교회일거라면서 또 따라나섰다. 그렇게 교회는 망할 수 없는 천국의 열쇠를 가졌던 것이다.

교회와 신앙이 천박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타협하면서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며 부자가 되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지금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부자가 되어 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가장 밑바닥 낮은 카타콤 지하에서 고난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었던 때가 행복했고 감사했던 기억이 너무 그리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

부자가 되고 기득권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는 이미 교인이 아닌 장사꾼이 되어 버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가난한 나그네들과 예배하고 그들의 편에서 산다고 하였지만 어느새 나는 타락했고 광야의 야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 신앙도 현실과 타협하였다. 진리가 아니고 정의가 아니라면 저항해라 했던 개혁가들의 정신을 언제부턴가 잊어버렸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 교회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어본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교회와 신앙은 이미 교회도 신앙도 아니다. 광야를 거닐면서도 가나안을 생각하고 그곳을 지향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야 했다. 잘살면 그때마다 출현했던 예언자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말하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타락했고 타협했으며 너무도 깊은 현실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스스로는 빠져 나올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더욱 문제다. 누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누군가 우리를 구원해 줄 사람이필요하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안된다는 점이다.

비참하게도 아니 너무 비극적이게도 너무 늦었다. 구원받기에는 우리의 과거가 너무 더럽고 추하며 냄새나는 썩은 생선토막처럼 널브러져 있다. 심판이 우선이다. 회개가 먼저이다. 우리는 너무도 역사를 몰랐고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던 거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당장의 권력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교회와 신앙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더 망가져 완전히 버림받기 전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광야로 돌아가자는 호세아 선지자의 권고를 들어야 하는 때다. 빈들로 가자. 다시 빈들로 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교회부터 개혁해야할 때임을 깨달아야 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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