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역경의 열매> 유해근 (4) 2017-04-06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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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국민일보<역경의 열매> 유해근 (4) 2017-04-06

둘째 아이 장애에 아내 탓·하나님 원망하며 방황

치료 때문에 유학 못가게 되자 불평 쌓여아들·아내에 사과하고 사랑하며 살기로

[역경의 열매] 유해근 <4> 둘째 아이 장애에 아내 탓·하나님 원망하며 방황 기사의 사진

큰 아들 영규(오른쪽 끝)군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유해근 목사와 아내 이강애 사모, 둘째 아들 영길 군이 사진을 찍고 있다.

                      

 

아내를 처음 본 건 19867월이다. 아버지 친구 분의 소개로 만났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인천 강화군 주문도라는 섬마을의 교사였다. 훗날 들어보니 아내에겐 목사와 결혼하는 데 대한 동경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목사 사모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난 군목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신학대 교수가 될 것이라 했다. 양가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했고 서로 호감도 있었기에 결혼을 서둘렀다. 군목으로 복무하는 동안 아내는 우리 부모님이 계신 경기도 광주의 중학교로 임지를 옮겼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까지만 해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둘째 아들 영길이는 예정일보다 20일정도 먼저 태어났다. 황달도 심해 인큐베이터에서 며칠 있다가 퇴원했다. 당시 나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고 가족과 함께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째가 큰 아이처럼 잘 자라지 못했다.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했다. 네 살이 돼서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엄마 외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정신지체2급의 장애를 갖고 있었다. 아내는 연차휴가를 내고 종합병원과 장애인복지관 등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한 특수교육원에서 치료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결국 교사직을 내려놨다. 매일 버스를 타고 걷고 해서 특수교육원에 다녔다.

 

나는 유학을 포기했다. 미국의 대학 두 곳에서 이미 입학허가서와 장학금 통지서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의욕이 꺾였다. 아내는 아이의 장애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치료에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나는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에 실패란 없다고 여겼다. 그러다 장애아를 갖게 되자 방황했다. 몇몇 교회에서 부목사 초빙을 해왔지만 응하지 않았다. 못난 남편이자 아빠였다. 아내와 아이를 보듬고 격려해야 했는데도 매일같이 원망과 불평만 했다.

 

영길이는 몸이 약해 열이 오르면 경기를 하고 고꾸라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애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라며 아내에게 윽박질렀다. 아내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울 뿐이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다른 사람들이 두 아들에 대해 물으면 첫째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아이를 보고도 외면한 채 길을 피해 돌아가기도 했다. 영길이는 자신에게 차갑던 아빠를 보고 뭐라 느꼈을까.

 

아내는 나보다 더 절망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저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했다. 나는 유학을 가는 데 발목을 잡은 게 영길이라고, 그 책임이 아내에게 있다고 여겼다. 비겁함을 넘어 모자라고 미숙했다.

 

아내와 아들에게 평생을 사과하며 살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아들 영길이에게 말하고 싶다. “영길아, 참으로 미안하다.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어야 했는데 깨닫지 못하고 원망만 했으니.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후회하고 있단다.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 아빠가 정말 잘못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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