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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유해근목사와 함께 하는 미션하이웨이-시베리아편(3)

이루크추크 바이칼호수에서

 

 

인간이 태어나 꼭 한번은 가보아야 한다는 곳, 바이칼의 알혼섬이다. 지금은 저녁 해가 지고 있다. 숙소에 도착하여 바이칼 호수를 트래킹하고 부르한 바위와 샤만의 축제가 열리는 서낭당까지 돌아보았으니 발바닥이 여간 아픈 것이 아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았다는 뿌듯함을 이길 수는 없다.

이르쿠추크에 도착한 것은 어젯밤 늦은 시간이었다. 하바로브스키에서 밤 10시 비행기를 타고 장장 세 시간 반을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이루크추크다. 하버에서는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우리가 예정했던 곳을 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특히 아쉬운 것은 중국 쪽에서 흐르는 흑룡강이 러시아로 흘러와 만든 아무르 강을 유람할 수 없었던 거다. 예정대로라면 우리는 아무르 강을 타고 강을 가로지르는 일정이 있었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바람에 배가 뜰 수 없었다. 바다같이 큰 아무르강은 '우리 물'이라는 의미처럼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하바로브스키에서도 곳곳에서 김정은의 뺏지를 달고 돌아다니는 북조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하바로브스키 역에서부터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는 곳곳에서 북한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시베리아 벌목공들이 많이 일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북한의 김정은뺏지를 달고 활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뜻밖에 하버에서 오래전 우리 공동체에서 사역했던 최성진 목사를 만나기도 했으니 세상이 얼마나 좁은가?

늦은 시간 하바로브스키 비행장에서 국내선을 타고 도착한 곳이 이르쿠츠크다. 바이칼의 도시답게 그곳은 바이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다. 처음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한안드레 선교사다. 나는 그가 고려인인줄 알았다. 말도 고려인처럼 어눌한 듯하여 당연히 고려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선교사란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 일행은 바이칼로 향했다. 대여섯 시간을 달려가는 작은 미니버스 안에서 김미자 권사님의 끼는 멈추지 않고 발산되었다. 모두들 자지러지게 웃고 거의 뒤집혀지는 상황까지 갈 정도로 모두가 흥겹고 즐거운 여정이다. 잠시 쉬기 위해 멈춘 시베리아의 초원 위에서 누군가 지금 이 순간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며 감탄을 한다. 행복한 모습들이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나와 함께 하는 자들의 감격과 행복이 곧 나의 감격과 행복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 대신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들이 바라보고 느끼는 것으로 나는 내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 내 경험은 나의 경험이 아니라 누군가의 경험과 감동으로부터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나는 누군가의 반응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반응이 곧바로 나의 반응이 된다. 나는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체험자가 되었다. 아내의 반응에서부터 작은 아이의 감탄하는 소리까지 누군가의 반응에 민감해진 이유다. 내 것은 곧 누군가의 것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그들의 기분과 느낌으로부터 내 삶은 경험된다. 나는 없다. 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누군가의 생각과 느낌만이 있을 뿐.

그래서 나는 슬프다.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은 나로부터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아프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아내에게 물어가며 내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초원이 보인다면 초원에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소떼를 생각하고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상상한다.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길이라고 하면 나는 온통 자작나무로 가득한 깊은 숲속을 거니는 사슴을 본다. 그리고 혹시 자작나무 숲속에서 호랑이가 나오지는 않을까를 생각한다. 하바로브스키 박물관에서 보았던 호랑이 박재를 생각하며 시베리아 호랑이를 마음에 그려본다. 어릴 적 읽었던 백호라는 시베리아 호랑이에 대한 책을 기억하며 나는 자작나무 숲속을 깊이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드디어 바이칼호수다.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 같았던 바이칼은 평범하고 오히려 소박하다. 찾아온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조용한 호수 그대로다. 세계 담수호의 1/5를 차지한다는 거대한 호수다. 남한의 80%가량의 크기라니 가히 호수가 아니라 바다라는 느낌이다. 알혼섬까지 가는 배를 기다리며 우리는 바이칼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까지 올랐다. 들꽃을 좋아하는 아내는 들꽃으로 가득한 바이칼의 언덕배기를 오르며 연신 감탄이다. 어떤 꽃이기에 그렇게 아내의 관심을 받고 있을까 궁금하다. 할미꽃이랑 에델바이스 같은 것이라 했다. 민들레가 지천으로 깔려있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바이칼의 야생화는 그대로 아내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아내는 야생화를 닮은 여자다. 들꽃처럼 강하고 그러나 요란스럽지 않은 그대로의 들꽃처럼 살아가는 아내는 바이칼의 들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향기를 풍기는 아내의 진면목을 이제야 새삼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한결같이 아내를 천사, 아니 날개 없는 천사라 했다. 온실속의 화려한 꽃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내는 바이칼 언덕의 야생화라 부르고 싶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내가 꼭 하고 싶은 것들 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바이칼호수를 찾는 것이다. 박범신 작가의 어떤 소설에서 바이칼 호수 통나무집에서 죽어가는 한 여자의 마지막을 그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물론 오래전 읽었던 '한민족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도 있다. 몽골의 홉스굴 호수를 여러 번 찾아간 것도 홉스굴 호수가 러시아 바이칼의 상류였기 때문이다. 바이칼은 내 영혼의 고향 같은 느낌이 있는 호수다. 마치 내 고향집을 찾아가는 어느 오래전 집 떠난 나그네처럼 나는 설레임으로 바이칼을 찾았다. 다른 이들도 그런지는 묻지 않았지만 나에게 바이칼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영혼의 본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곳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발원지이며 세계 샤먼들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샤머니즘이 무엇인가? 무당의 소굴이다. 무당의 혼이 가득한 땅이다. 하늘과 땅의 합일이 있는 곳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절,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던 무당들의 접신이 느껴지는 영적인 곳이다. 우상숭배가 아닌 가장 인간적인 그러나 가장 신적인 땅이 바이칼 알혼섬이다.

나는 알혼섬을 동경했다. 그곳이 영혼의 고향 즉 본향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 것은 내가 신대원 졸업을 하면서 썼던 졸업논문과 관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아가 역사공부를 시작하고 선교적 문제까지 고민하고 가장 근접해 찾아야 할 곳이 바로 바이칼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바이칼은 역사와 철학, 선교적 답안지를 몽땅 소유한 공간이다. 그곳은 영혼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적인 고통까지를 온몸으로 간직한 공간이다. 시베리아의 추위와 바이칼의 존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나아가 이제는 우리의 개인적 실존과 영혼, 그리고 통일이라는 역사적 관계까지 얽히고설킨 정신문화의 땅이다. 나는 대학시절 읽은 니콜라이 베르자예프의 '거대한 그물'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내게 기독교 사회주의를 가르쳐 주었으며 정신문화를 위한 자유 아카데미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화두를 던져 준 사람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베르자예프는 코펜하겐의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가장 중요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훈련을 내게 시켜준 사람이다.

 

나는 지금 늦은 시간이지만 잠을 잘 수가 없다. 여기가 알혼섬이기 때문이다. 바이칼의 알혼섬에서 어찌 잠을 잘 수 있는가? 아내는 잠을 잔다. 사람들은 알혼섬을 알지 못한다. 바이칼도 모르는 이들에게 어찌 알혼까지 가르칠 여유가 있는가? 아는 이들은 안다. 모르는 이들은 모른다.

아는 것은 고통이다. 알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모르면 잠을 잔다. 알면 잠을 이룰 수 없다. 하늘에서는 별이 빛난다. 별은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또한 그 별은 보이는 이들에게만 별이다.

 

알혼섬은 분명히 우리 민족을 비롯한 몽골로이드의 본향이다. 여기서 몽골의 핏줄은 시작되었다. 칭기즈칸은 물론이고 여기서 한민족이 시작되었다. 하늘을 보며 시작한 부르한 바위의 '부르한'은 몽골말이다. 그 위는 홉스굴 호수다. 몽골에서 시작하여 시베리아 바이칼까지 흐르는 그 호수의 의미는 바이칼에서 한 점을 찍는다. 여기서 우리와 똑같은 문화와 인류가 시작되었다 한다. 한 부류는 상류인 홉스굴을 지나 몽골 초원에서 한민족으로 반도까지, 또 한 부류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수메르 민족으로 이어졌다 했다. 누가 그 주장을 했던지 나는 그것에 의미의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분명한 사실은 여기 바이칼이 발원지이자 시작이다. 바이칼이 의미하는 존재의 힘은 원초이며 원산이라는 것이다. 바이칼은 최고가 아니라 최초를 말한다. 바이칼은 높이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시작이 되라고 가르치는 삶이다. 그래서 나는 바이칼을 오고 싶었던 거다. 바이칼을 가는 것이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바이칼이다. 나는 지금 바이칼 알혼섬에서 이 글을 쓴다. 다 잠을 자는 늦은 시간에도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 이 밤에 알혼섬에서 나는 지금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을 감고 이 글을 쓴다. 자꾸 돌아가신 아버지 장로님이 떠오른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을 더 깊이 감는다. 눈을 깊이 감을 수 없을 때까지 더 깊이 아니 더 세게 감는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불빛이 더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강하게 눈을 감아버리고는 자판 위의 손가락만을 남겨놓고 다 벗어버린다.

오늘밤은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처럼 내 존재까지 벗어버리고 샤먼이 황홀해서 춤을 추는 것처럼 나도 흐느적거리며 영혼의 춤을 춘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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