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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경제17 예수님과 돈

마태복음 6 : 20 - 21 / 누가복음 21 : 1 - 4

 

예수님의 투자법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가? 아니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 돈에 영혼이 있다면 그 돈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돈에는 다리도 있고 팔도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영혼과 마음까지 들어있다면 과연 돈은 인격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돈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과연 돈의 의미를 이토록 제대로 설명한 경제인이 있을까?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말씀을 들어보면 가슴이 뜨끔하다. 나는 돈과 관계가 없다고 발뺌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돈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그 돈을 땅에 쌓아둘 것이 아니라 하늘 창고에 쌓아두라 하신다. 왜냐하면 땅의 창고는 썩게 하는 것이지만 하늘 창고는 영원히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의 길로 들어선 것과 같다. 과연 어디에 돈을 투자할 것인가?

예수님의 투자법은 단순하다. 그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투자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라 생각한다. 어떤 부동산도 주식도 아니 역사상 그 어떤 투자도 예수님의 투자의 승률을 이길 수 없다. 워렌 버핏이나 템플턴 같은 투자의 귀재들도 예수님의 투자에 비하면 조족지혈, 새발의 피다.

예수님은 땅에 투자하는 것과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으로 비교하신다.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가? 지금까지 역사가 보여준 가장 높은 아니 절대적으로 확실한 투자처는 하늘 나라였던 것이 드러난다. 땅에 투자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했으며 많은 이들이 땅에 투자하고는 후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후회한 사람이 없으며 나아가 가장 잘 한 투자였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니 과연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옳다.

투자는 경제다. 아니, 경제는 투자다. 인생은 그런 면에서 정치적이기 보다는 경제적이다. 사람은 정치적이며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동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인 것이다.

인생이란 평생 투자하는 삶이다. 인간은 어딘가에 투자하며 살아간다. 자식에게 혹은 남편이나 아내에게 투자한다. 친구에게 혹은 다양한 어떤 존재들에게 투자하며 살아간다. 가장 의미있는 곳에 돈이 쓰여져야 한다며 자신의 재물을 나누는 일에서부터 살아 죽는 날까지 그렇게 벌어 투자하는 것이 인생이리라.

그러나 어디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며 의미있는 것일까? 이는 사람에 따라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나는 자식에게 투자한 사람을 보았다. 평생 벌어 자식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았다. 과연 잘 한 투자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실패한 투자다. 자식에게 물질을 남겨준다는 것은 모든 부모의 동일한 마음이다.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사랑하게 때문에 남겨준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돈은 그 사랑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믿을만한 존재가 아님으로 그 투자는 실패다. 그런 측면에서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이들도 자식에게는 최소한의 것만을 남겨 준다고 했다. 지혜로운 결단이다. 그리고 그들의 엄청난 재산은 공익을 위하여 쓰여지도록 재단을 만들어 출연하거나 모든 이들에게 의미있게 쓰여지도록 흘려보낸다. 역시 돈의 천재들은 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측면에서 우리 인생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경제적 투자법을 가르쳐 주신다.

즉 땅에 투자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땅에 투자하는 순간 그 재물은 썩기 때문이다. 썩지 않고 영원히 간직되거나 나아가 그 투자로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 투자하라 하신다. 그 투자는 완벽하며 후에 칭찬받는 투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은 천국에 투자하는 것이다. 인간이 답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선교적 투자법을 익히자.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님은 돈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돈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는 곳에서 메시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돈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돈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돈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굳이 돈의 성격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간단하다. 솔직히 믿음과 돈의 관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고 그러면 그곳에 돈이 있다. 돈과 믿음의 삶은 비례한다. 그것이 진실이다.

 

유산 안남기기 운동

나는 예수님의 돈에 대한 확실한 투자법을 생각하면서 유산안남기기 운동을 생각했다. 그리고 가급적 선교적 투자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선교적 투자란 선교하는 투자다. 말 그대로 구원을위한 선교적 삶에 투자하고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만이 가장 효과적인 투자이기 때문이리라. 공익을 위한 다양한 재단에 출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선교적 투자를 권한다. 자녀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재산만 물려주고 투명하고 믿을만한 선교재단에 투자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곳에 우리의 재산이 쓰여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가장 의미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과부의 두 렙돈과 예수님의 돈에 대한 생각

예수님의 돈에 대한 생각은 돈의 크기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이 갖고 있는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어느 날 두 렙돈을 헌금하는 한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 여인의 두 렙돈 헌금이야말로 가장 큰 헌금이라 하신다.

렙돈은 유대의 화폐로서 최소 단위이며 지금으로 따져 한 렙돈은 약 400원이니 두 렙돈이라면 800원에 불과하다. 이렇듯 작은 액수의 돈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장 큰 액수라 하시니 그것은 그 과부의 전부를 드렸기 때문이라 하신다.

천만원 가진 자의 십만원 헌금과 만원을 가진 자의 돈 전부를 드리는 것은 그 가치가 다르다. 부자의 헌금액수와 가난한자의 헌금의 가치는 다르다. 즉 돈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양으로 측량하는 헌금이 아니라 질의 가치로 바라보아야 함을 가르치시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야 말로 돈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은 스스로 말한다. 돈은 그 자체가 인격일 수 있다. 돈은 사람을 설명하는 기준이기도 하며 그 돈이 인간의 인격과 삶의 가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돈에는 수많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돈의 크기와 액수에만 관심을 가지고 돈의 액수가 많으면 그 사람의 삶의 무게도 더 나갈 것으로 착각하는 돈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액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오류일가능성이 많다. 돈의 액수는 사람의 크기나 됨됨이를 혹은 신앙의 유무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돈은 그 양이 아니라 질로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돈은 그 과부의 전부를 드린 것이다. 그 헌금은 액수와 관계없이 그 과부의 인생 자체이며 그 돈은 과부의 목숨과도 같은 돈이니 그 가치는 액수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다.

우리는 그 과부처럼 헌금하는가? 과부처럼 주님에게 드리면서 자신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위하여 간구하는가? 아니면 가지고 있는 것 중 여유를 조금 나누어 드리면서 애써 표정을 그렇게 연출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자신만이 알 일이다. 과연 우리는 과부처럼 헌금하는가?

물질 속에 믿음이?

헌금과 믿음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보면 분명히 믿음과 헌금은 관계가 깊은 것이 사실이다. 돈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말씀과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살펴보면 분명히 믿음과 헌금은 관계가 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헌금하기로 한 자신들의 약속을 어기고 속여 일부만을 가져 온 부부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매우 무서운 이야기다. 그들 부부의 죄는 무엇인가? 액수를 속인 것이다. 모두를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한 것이 문제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마치 전부를 가지고 온 것처럼 제자들을 속인 것이다.

 

얼마 전 우리 몽골학교에 매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잘 알지 못하는 어떤 권사님이 계신데 그분은 우리 몽골학교에 상담실 하나를 자신의 딸 이름으로 헌금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오랫동안 조금씩 헌금을 하신 분이다. 내가 오래전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 몽골학교 건축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는 작은 상담실을 위하여 헌금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 후로 조금씩 돈이 생길 때마다 은행 구좌를 통하여 헌금을 보내곤 하셨다. 그런데 얼마 전 전화를 하여 혹시 자신이 약속한 헌금이 얼마나 남았느냐며 나머지를 한꺼번에 보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잘 기억하지도 못하는 약속이었다. 나는 그 권사님을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그토록 관심을 갖고 헌금하시고 나머지를 돈이 생겼다며 한꺼번에 하시겠다니 이런 감사한 일이!

그렇게 해서 목돈이 몽골학교에 헌금으로 입금되었다. 물론 우리로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 그 약속은 우리와의 약속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생각과 믿음으로 헌금의 약속을 지키려는 그 권사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믿음에 대하여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생각했다. 약속은 약속이라는 그 믿음이 크다. 약속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그 권사님의 믿음이 소중하다.

사람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은 더욱 소중하게 지켜져야 한다. 믿음과 헌금의 관계는 그런 약속에 대한 마음이며 실천이다. 믿음으로 약속한 것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약속의 삶을 실천하여야 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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