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없다 1. 아브라함처럼 가출하라(2)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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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은퇴는 없다 1. 아브라함처럼 가출하라(2)

그 이유는 노인들이 많이 살아서란다. 노인들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될 것인데 무슨 재개발이냐며 재개발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많이 사시는 아파트이므로 재개발해서 더욱 좋은 환경에서 사시면 좋으련만 그게 어려운 것이다. 한번 이사 오면 웬만해서는 이사할 생각도 하지 않는 그런 아파트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것도 거의 20년을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도 이사할 생각이 별로 없다. 나도 그렇게 늙어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떠나가야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것이다. 자꾸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복 받는 사람이 되려면 집을 떠나는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은 움직이는 동적인 존재에게 다가서는 특징이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두 번째의 복된 인생을 사는 조건은 바로 나그네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축복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 떠나온 인생들을 축복하는 사람이 복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원천이며 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다.

문제는 언제나 간단한 곳에 답이 있다. 핑계대지 말고 순종하면 성공의 길, 축복의 삶으로 다가서는 것이며 반대로 변명과 핑계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한계 안에 매몰되어 버리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저 그런 인생으로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핑계대기 좋아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이이고 또 하나는 건강이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면서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 아파트 노인들처럼 재개발은 무슨 재개발이냐며 새로운 미래를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과, 몸이 아프다며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이들은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한다. 75세 된 노인의 이사를 보라. 나이 드신 어르신의 도전을 보라. 도전이 순종이다. 순종은 곧 도전이다. 분명히 아브라함도 두려웠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확실한 주소지도 없는 가운데 막막하고 불투명한 미래와 미지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오늘 은퇴를 다시 생각해 볼이다. 제대로 만들어지고 준비되어 있는 미래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떠나는 모험이다. 당시 자기 고향땅을 떠난다는 것은 곧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는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다. 혼자서도 아닌 자신의 늙은 아내를 데리고 어디로 이주해야 한단 말인가! 

아브라함은 당시 적지 않은 부와 기득권을 가진 족장이었다. 그 정도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 없는 안락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얼마나 더 큰 횡재를 하겠다고 그 나이에 고향을 떠나느냐고 모든 이들이 아브라함을 설득하며 쌍수를 들고 말렸을 때 아브라함이 느꼈을 인간적인 고뇌도 엿보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아브라함과 사라는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었다. 그것이 보기 좋은 순종이다. 하나님이 기분 좋은 이유는 모든 기득권과 안전에 대한 욕망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그 뒷모습이다.

가야한다. 늙음은 핑계가 아닌 그저 하나의 현실일 뿐 새로운 미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몸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나이를 핑계 삼지 말고 과감하고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은퇴자 시니어는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한다.

 

또 하나의 증거

창세기 18장을 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에 그의 나이가 100세였다. 사라의 나이는 90세였다. 백 살의 노인이 자식을 얻었다. 왜 성서는 그들의 나이와 아들 이삭을 얻은 사건을 대비하는가?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수태고지의 현장을 찾아가 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약속 하시는 순간 사라가 장막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너무 늙었으며 사라 또한 경수가 끊긴 것이다. 여자로서 생식을 할 수 없는 나이였다는 말이다. 더 이상 인간의 상식으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는 상심이 가득한 한숨 섞인 넋두리다. 그런 순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하시니 사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라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그녀는 장막 뒤에 서서 그 야기를 듣고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었을 게다. 하나님이 그 순간 사라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신다.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창세기 18:9~15)

 

지금 우리는 나이와 상식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사라는 그들이 늙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늙음이란 그렇게 그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조건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늙음으로 모든 것을 덮고 자신을 포장한다. 나이와 늙음으로 자신의 삶을 제한해버리면 그 외의 것들은 다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늙음이 우리를 규정하지 못한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늙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이유가 아니다. 왜 늙음으로 자신을 무능하고 형편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가?

사라는 나이와 늙음으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브라함이 늙었으며 자신의 생리가 끊어졌음으로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거다. 나이와 늙음이 희망을 포기하게 했다. 나이와 늙음은 미래를 포기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결코 나이와 늙음이라는 현실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가능이 있겠는가? 그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사라에게는 상식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만을 믿으려는 이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자는 논리는 현대인들의 세계관이며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하는 오늘날의 합리적 논리이다. 그러나 반갑게도 신앙은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판단유보의 것이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판단자체가 불가능한 차원의 것이다. 어떻게 100살의 노인과 90살의 할머니에게 임신이 가능하겠는가?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뛰어넘어야 기적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너머에서 이미 역사하고 계셨던 거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이다. 죽기 전까지 먼저 운명을 결정하지 말라는 것. 죽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를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 나이에 웬 가출이냐고 빈정거림을 당해도 아직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한다. 여전히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으로 도전하며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필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새로운 생명 이삭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를 본다.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특별히 나이가 많아 더 이상의 도전과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필자는 아브라함의 삶과 사라의 축복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것은 현실이다. 아니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참 모습이다.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비신앙적이며 여전히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어떻게 아브라함의 은총을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가이다.

 

가출해야 성공한다  

가출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성서에서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이 무척이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러니 그의 후손들은 한결같이 집 나온 사람들이다.

가장 가깝게는 그의 며느리 리브가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청혼 한마디에 얼굴도 성격도 모르는 이삭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나서는 리브가야말로 당차고 쿨하다. 그래서일까 리브가는 성서에서 가장 리더십이 있는 여자 혹은 가장 경영을 잘 할 것 같은 여성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야곱을 축복하는 어머니다. 그녀의 아들 야곱은 축복의 상징이다. 집에서는 둘째 아들이었음으로 장자의 상속권을 가질 수 없는 원초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의 축복권도 아버지가 형 에서만을 편애하였음으로 야곱이 차지하기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신의 한계와 운명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성공하고 싶었다. 축복의 자리에 앉고 싶었던 거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상속권과 축복권을 얻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기엔 그의 전략이 옳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야곱을 성공과 축복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계기는 장막에서 광야로 인생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변경시켰을 때다. 장막이라는 보호막에서 광야의 유목민이 되어서야 축복된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야곱 역시 가출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성공법칙을 따른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가장 사랑했던 아들은 라헬에게서 낳은 요셉이다.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는 것은 다른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야곱의 사랑은 요셉의 고난으로 돌아갔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와 시기로 미디안 장사꾼들에게 팔려 애급의 장군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간다. 요셉도 야곱처럼 집을 떠나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나서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요셉의 성공도 아버지 야곱처럼 집에서 떠나 길 위의 인생이 되었을 때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애급의 총리가 된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과 조우하며 감격적인 만남을 갖는다. 버려진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에 형제들이 놀라는 장면을 상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한결같이 집을 떠나 나그네 유목민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성공과 축복의 자리에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가출해야 성공한다는 하나님의 성공법칙을 최초로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최초의 나그네로 길 위의 인생이 되었을 때로부터 그의 후손들은 당연히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75세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고향을 떠나 길 위의 인생으로 살겠다는 순종과 결단이 오늘날 은퇴자에게도 가장 필요한 성공의 조건인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브라함이 아닌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삶을 살아보자. 나이를 먹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접고 오히려 멀리 더 멀리 떠나는 그가 부럽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다. 믿음의 아버지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은 나그네의 삶을 그 민족의 유전자에 담아 그대로 살아간다. 성서는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영적인 나그네라고도 한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 후 175세에 모든 생을 마감한다. 창세기 25장 7절 말씀에 보면 그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나타난다. 75세에 부르심 받아 175세까지 살았으니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이 100년이다. 우리도 60세에 부르심 받아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 100살까지 산다면 40년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남은 인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섭리와 계획을 따라 살다보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아브라함처럼 길 떠난 은퇴자들  

나섬교회에는 아브라함 같은 이들이 여럿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정길 장로님이다. 그는 평생 의류사업을 하던 사업가다. 그의 부인 최권사님은 남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했고 서장로님은 그 의류를 만드는 공장을 하면서 한때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우리 교회를 알게 된 것은 뉴라이프 비전스쿨에 참여하면서다.

비전스쿨을 수료하고 뉴라이프 선교회에서 떠난 필리핀 단기선교에 장로님 부부가 참여하였고 그 후에 뉴라이프 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필리핀 앙헬레스 지역에 필리핀 행복학교를 세울 즈음 서장로님 내외가 필자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필리핀 선교사로 떠날 것을 결단했다며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 나이로 70세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은퇴 선교사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그분들의 결심은 가장 용기있는 결단이며 순종이었다. 드디어 20165월 서장로님 부부는 나섬교회와 뉴라이프 선교회의 이름으로 필리핀 행복학교에 파송되어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나는 그날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했고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다.

지금 서장로님 부부는 필리핀 행복학교에서 필리핀 청소년들과 빈민지역의 여성들에게 양재 교육을 시키며 매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필자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일생에서 지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감사의 고백을 했다. 필리핀에서 가장 쾌적하고 안전하다는 클라크 지역에 아름다운 집을 구입해 매우 흡족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내외분을 바라보며 나 역시 참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또 한사람의 아브라함은 이만영 장로님 부부다. 그들은 필자의 네 번째 책 '노마드 예수'에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 또 한 번 소개하고 싶다. 필자는 노마드 예수라는 책을 호주 시드니에서 썼다. 그 당시 나는 아내와 함께 이장로님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책을 쓰고 있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 자신들의 집을 게스트 하우스로 우리 부부에게 빌려주면서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분들이다.

그들은 일찍이 호주 시드니로 이주를 한 이민 1세대다. 호주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매우 성실하고 신실한 신앙인이요 사업가였다. 그렇게 맺은 인연의 줄은 몇 년쯤 흘러갔으며 가끔 오고가는 소식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아침 뜻하지 않게 이 장로님 내외가 우리 교회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랄 만큼 생각지도 못했던 출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장로님 부부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신기할 정도로 내게 흥미있는 사건이었다.

이 장로님 내외는 이미 호주에서 성공한 이민자로 살던 분들이다. 내가 알기로도 호주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두 딸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낼 모든 조건을 갖춘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갑자기 한국의 나섬을 찾았다. 더 놀라운 것은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다.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호주가 싫어서도 아닌 전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 한국에 오셨으며 그 시작을 나섬에서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서 호주로 다시 호주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의 나섬을 징검다리 삼아 세계로 떠나고 싶다는 고백도 하셨다. 완벽한 노마드 나그네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조건이다. 떠날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후 이장로 내외는 터키와 그리스의 무슬림 난민들을 선교하는일에 전념하고 계시면서 새로운 선교적 삶을 실천하고 계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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