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없다 10 뉴 라이프 선교사가 되는 길 위로 올라오라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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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은퇴는 없다 10 뉴 라이프 선교사가 되는 길 위로 올라오라

 

 

몽골 울란바타르 외곽에는 과거 돌궐족의 장군이었던 돈유쿠크의 비문이 있다. 그 비문에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 그러나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문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내 방 한가운데 벽면에는 이 문장을 크게 적어 붙여 놓기도 했다. 유목민들의 철학과 정신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하라면 바로 이 문구가 될 것이다.

내가 특별히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성서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의 핵심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후손들 모두에게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안전한 성안에 머물지 말고 길 위의 인생을 결단하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늙었다고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 말고 위기의 광야로 혹은 길 위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보라 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과연 우리 시니어들은 성안에서 길 위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며 살아가려 하는가? 변화를 인정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는가? 안타깝지만 늙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생명을 다하겠노라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주변의 시니어들에게서 배우고 알고 있는 삶의 여정이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진 이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과거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늙음과 죽음의 관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성에서 길 위로라는 삶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삶이다.

 

성안에 머무는 삶이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생이다. 성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혹은 그 성이라는 안전한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도전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과감하다. 그들에게 광야는 더 이상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다. 자신이 멈추어 있으려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신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그의 며느리 리브가와 손자 야곱과 그들의 후손인 요셉이 그랬다. 모세가 그러했으며 예수와 바울도 집에서 나온 유목민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갔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제한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새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주를 했다. 모세도 나이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애급땅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갈렙은 85세 때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며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요청하며 결국 헤브론 땅을 차지한다.

성안에 안주하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주어질 수 없는 은총이 그들에게는 일어난다. 그 이유는 성안에서 길 위로 나왔기 때문이다.

성은 죽음의 대합실이다. 성안에 머물면 죽는 날만 기다리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불행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궁극적 목적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길 위의 인생만이 죽는 날까지 쓰임 받고 은총의 삶을 살 수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그런 삶의 정신과 철학,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길 위의 삶은 때로 고단하다. 나는 처음부터 길 위의 삶을 살기로 했다. 군목을 전역하고 1990년 결코 기존의 제도권 교회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비주류 목회자의 삶을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길 위의 삶이란 도전하고 개척하는 삶이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물이 흐르도록 만드는 토목공사의 삶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고생이 많을까? 그러나 그 삶은 누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이 숨겨져 있음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유목민처럼 살았다. 광야의 목회를 밥 먹듯 했고 나그네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며 그들 편에서 살았다. 나그네들의 생각과 삶을 이해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편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순간순간 판단하고 결단했다. 그러기를 오늘까지 제대로 쉬어본적이 없이 달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으로 전락하였고, 몸은 온통 멍자국과 상처로 찢기고 구겨졌다. 머리는 다 빠졌으며 나이에 비해 늙어 나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너무도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질만큼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늙어 보여도 괜찮다. 고생을 했다면 그것도 인생의 훈장처럼 여길 줄 아는 여유를 배웠으니 나쁜 것은 아니다. 강해지려면 강한 훈련이 필요하듯 나는 강해졌고 어디서도 물러서지 않는 힘을 키웠다. 때로는 막막한 현실에서 절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밑바닥 저력을 키웠으니 나에게는 모든 것이 선이다.

그 모든 고백과 깨달음은 오직 길 위에서 배웠다. 성안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진정한 삶의 의미는 모두 길 위에서 얻어진 것이다. 성안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얻어질 수 없는 참 행복을 길 위의 여행자가 되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길 위에서 감사를 알았고 길 위에서 수많은 여행자와 동행할 수 있었음으로,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나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목회가 아닌 나섬과 동행하는 이들이라는 새로운 목회적 패러다임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지 몇 명의 교인들을 목회하는 목회자라는 협의의 목회를 거부할 수 있었다.

'전세계가 나의 교구'라는 요한 웨슬리의 선언을 나도 한번은 그럴듯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살 게 되어 기분이 좋다. 전세계에 나의 친구들이 퍼져 있어 나는 언제든 세계를 이웃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인생이 되었다. 소유의 목회가 아닌 공유와 접속의 목회를 꿈꾸었기에 가능한 은총이다. 그 모든 것은 길 위에서만 얻어지는 경험이며 자랑거리다.

 

성안의 목회는 나의 철학에는 없다. 물론 안주하고 싶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야 왜 없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길 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암시하며 스스로를 내모는 결단을 했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먼저 몸으로 뛰어 들었고 생각이 주저하면 말로 선언해 버렸다. 그래서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나를 포박하였으며 내 삶을 그렇게 하도록 길 위로 내 쫒았다. 두려움이 생기면 죽자고 결단했으며 벽안에 갇힌 것처럼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에는 '벽안에 문 있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구를 곱씹으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문은 열렸고 새로운 미래로 길이 연결되었다. 그 길 위에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세상이 펼쳐졌으며 나는 그런 삶을 반복하며 길 위의 목회자로 단련되어갔다.

성안에서 길 위로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길 위의 삶을 살아간다. 나이를 먹어 손자를 본 중년의 아니 초로의 사람이 되었지만 죽는 날까지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시니어가 인생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법

교회의 일꾼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것은 목회적 수사에 불과하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말장난에 불과한 목회자의 언어일 뿐이다. 어떻게 교회의 일꾼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과 동일한가?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같은 것인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교회의 일꾼일 경우는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인을 교회 안에 붙잡아 두려는 얄팍한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교회가 유독 교회 안에 교인을 붙잡아 두려는 경향이 짙다. 그것은 아마도 이단과 건강하지 않는 교파나 교회로부터 교인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지나치게 교회 안에 교인들을 매몰시켜 교회 밖 교회, 교회 밖 하나님의 선교라는 커다란 주제와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아마도 교회 안에 교인들을 가두어 놓음으로 목회자의 목회적 영역을 독점하려 하거나 성안의 교회를 쌓으려는 목회자의 욕망과 관계되어 있으리라.

한국교회에서 교인은 목회자의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교인수와 비례해서 헌금의 액수가 결정되고 그 교인수와 헌금의 양이 목회자의 목회를 평가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럼으로 목회자는 어떻게 하든 교인을 늘려 부흥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만 자신의 존재 이유가 설명되어지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욕망의 목회와 번영의 목회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은 그런 목회적 악순환의 고리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교회라는 공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마치 교회 밖에는 악한 사단의 세력이 있으니 교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식화되어가고 있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이 교회 밖 또 다른 공동체나 교회와 연관 맺는 것에 예민하다. 혹시 다른 교회에 교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경계하고 반대한다. 물론 이단에 빠지는 교인을 놓고 방치하는 목회자라면 그건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미래 선교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건강하고 성숙한 선교단체까지 경계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교회는 목회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할 이유가 있으며 교회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일뿐이다. 욕망하는 목회와 성공과 성장이라는 탐욕의 목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건강한 목회와는 차이가 있다. 교회의 일꾼은 교회의 일꾼일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스러운 이름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 쌓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성을 쌓고 그 성안에서 안주하며 성을 지키려는 기득권의 대명사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 교회가 성을 쌓더니 성에서 성을 지키며 기득권을 누리는 천박한 자본가라고 손가락질 하며 비판하고 있다. 성을 쌓고 성을 세습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라고도 부른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델일 경우에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성이 되어버린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모델일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 한국교회의 이중성을 너무도 잘 안다. 우리는 그런 비판에 대하여 겸손해져야 한다.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다. 성안에 있는 사람은 본래 사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은 물론이거니와 성안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을 개척할 수 있는가? 성안에서 과감하게 나와야만 길 위의 인생으로 길을 닦는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가 될 수 있다. 성안에서 길 위로 올라오는 결단이 없이 그리고 그러한 인생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 위로 올라오는 사람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아브라함과 리브가와 야곱과 요셉처럼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그들은 용기가 있으며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위대하게 쓰임 받고 싶다는 선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인생을 산다. 건강과 세상의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핑계 삼지도 않는다. 믿음만으로 결단하고 주저하지 않으며 길 위로 올라선다.

 

우리는 성안에서 길 위로 올라오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애급의 종살이를 하던 이들은 결코 만나와 메추라기를 맛볼 수 없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바라볼 수도 없다. 애급의 성안에서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려는 이들은 결코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선 자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라 하신다. 애급에서 광야의 길로 들어서야 인생이 바뀐다. 그때부터 하늘의 은총은 그를 벗 삼아 놀아주시고 만나주신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자를 쓰시고 그 자유는 용기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애급의 노예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광야의 고난이 두려울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광야에 나온 히브리 백성들은 그 자유를 애급의 종살이와 비교하며 차라리 애급에서 죽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그것이 바로 에릭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만큼 자유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개념이다. 그것은 아무나 얻어낼 수 없다.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소유한자만이 얻을 수 있는 궁극적 선이다.

 

길 위로 올라오는 것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결단하는 삶

한국교회 시니어 은퇴자들은 대부분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평생 교회 안에서 교회의 일꾼으로 살다가 은퇴자가 되거나 시니어가 되었다. 우리 아버지 장로님도 어머니 권사님도 그렇게 사신 분들이다. 그렇게 평생을 봉사하고 교회를 섬기셨다가 아버지 장로님은 2014년 소천 하셨다. 나는 그때에 무척이나 후회하고 가슴이 아팠다.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장로님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조금이라도 헌신하시다가 돌아가시도록 안내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 장로님은 우리 뉴 라이프 선교회의 정규 멤버는 아니셨지만 많은 분들과 교제하시고 함께 더불어 미션 하이웨이를 다녀오신 경험이 있다. 그러나 더욱 헌신하셨어야 했다.

보통의 시니어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살다가 교회 안에서 죽어간다. 자기 교회의 이름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는 마치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그 교회의 브랜드를 가지고 갈 것처럼 어느 교회 장로, 권사하면서 말이다. 고작해야 그 교회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이 전부임에도 그들은 좀처럼 움직이지도 세상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 시니어의 자랑은 평생 어떤 목사님과 어느 교회에서 어떤 위치에서 교회생활 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그들 중 교회생활과는 별도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선교적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분들은 대체로 교회 밖 정보에 능하고 다채로운 네트웍을 가지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정보와 네트웍이란 현대 사회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정보와 네트웍의 한계도 있겠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대체로 목회자가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 목회자들이 목회적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요청한다. 이제 미래 목회는 소유의 목회가 아니라 공유와 접속의 목회다. 소유하려는 것은 미래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보다 큰 기업을 이루려면 소유하는 기업인이 아니라 공유와 접속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야 하듯 우리 교회도 모든 교인들을 나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라는 성서적 목회관으로 회귀하여야 한다. 교회는 더 이상 목회자에게 교인 수 늘리는 목회를 강요해서도 안 될 것이며 목회자는 그런 교회의 묵시적 압력도 거절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기업들은 모두 소유한 것이 없다. 아마존은 자신의 가게를 갖지 않고도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을 운영하며, 에어 비 앤비(airbnb)는 자신들의 명의로 호텔방 하나 갖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숙박시설을 운영한다. 우버(uber)는 자신들의 자동차를 한 대도 갖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큰 운송업체가 되었다.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고 접속함으로 세상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 주었다. 기업도 그러할진대 왜 공적인 교회가 사적인 기업처럼 소유하려는 것인가? 공적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과 접속하고 세상과 공유하는 목회가 되어야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소유의 사적 교회라는 한계를 극복할 때만 다시 회복하고 그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교회의 브랜드화도 문제는 문제다. 교인들은 그 브랜드화된 교회를 선호한다. 그러나 교회가 왜 명품 브랜드처럼 자본주의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뉴 라이프 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목회적 모델을 생각했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접속의 목회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한 저수지에서 함께 더불어 사역하고 섬기는 공동체적 목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니어 은퇴자 개인은 각자의 교회에서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주일 예배와 주어진 모든 집회에 동일하게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지교회가 할 수 없는 선교적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그 선교적 삶을 나눌 수 있는 현장중심의 사역자로 나오는 것만이 다르다.

예를 들어 뉴 라이프 선교회의 회원들은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교회에서 하던 모든 신앙생활을 유지한 채로 동대문 비전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다문화 이주민 사역자로 약속한 시간에 나와 봉사하고 섬기는 사명을 다한다. 나는 그분들의 사역에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교회와 선교현장을 결코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권사 장로 집사이며, 동대문 비전센터에서는 이주민 나그네들을 선교하는 시니어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뉴 라이프 선교회는 시니어 선교사들을 훈련시키며 네트웍하고 필요할 때에 선교적 자원으로 동원하면 되는 것이다.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유와 접속의 선교지를 개발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나는 교회를 키우려는 목적으로 뉴 라이프 선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그 풍부한 선교자원을 네트웍하고 재활용하려는 목적으로 뉴 라이프 선교회를 만들었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교회가 목회적 패러다임을 소유의 목회에서 공유와 접속의 목회로 변해야 하며, 교인들은 성안에서 머물던 신앙생활의 울타리를 넘어 길 위의 선교적 인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뿐이다.

목회자의 목회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교인들의 교회 밖 선교적 삶으로의 전환이 세상 속에서의 교회와 성도들의 미래를 복되게 할 것이다.

나는 최근 뉴 라이프 선교회와 역파송 선교 그리고 이주민 선교의 융합적 모델을 통하여 이러한 접속의 목회를 실험중이다. 모든 선교적 프로그램을 소유의 목회라는 관점이 아닌 공유와 함께 더불어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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