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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경제24 창조적 독점과 고난

 

창세기 47 : 13 - 26

 

요셉의 창조적 독점

요셉에게서 우리는 창조적 독점의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이방인 나그네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갑자기 바로의 측근으로, 다시 총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전환점은 그의 창조적 경제와 독점적 전략 때문이었다. 우리 인생이 때로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지는 몇 가지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요셉처럼 극적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는 본디 야곱의 11번째 아들로서 꿈꾸는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했다는 이유로 형들에게서 시기와 질투를 받아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 애급의 보디발이라는 장군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망과 고통스러운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아 감옥에까지 들어가는 비운의 청년이 되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시련이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나 또한 끝없는 추락을 경험해 보았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지만 그때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믿음도 그 순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니다. 나는 믿음에 대하여 회의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내 삶의 고난은 불연속적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이 계속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평과 원망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결코 창조적이지 않았으며 모든 면에서 부정적이었다. 삶에 자신감을 잃었으며 더 이상의 비상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내려가 보아야 한다. 그런 상황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드디어 나는 나를 찾았다.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역설이다. 절망에서 사랑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역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삶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찾아 나섰다. 이전의 내가 아닌 이후의 나를 찾았다. 더 이상 세상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모든 면에서 나는 나다움의 의미를 깨달았다. 글쓰기에서부터 말하기까지 아니 생각하는 법에서부터 사역에 대한 선택과 결정에 까지 나는 오직 창조적이기를 결심했다. 길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가열 차게 했다. 길이 되기로 했다. 길이 없으면 내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설 것이며 그것도 없다면 결국 길이 되겠노라 결심했다. 내가 가면 그것이 곧 길이다. 나만의 길이 더 중요하다.

창조적일 수 있음은 축복이다. 그러나 창조적인 인간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 영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절박함으로부터 기인한다. 엘론 머스크(Elon Musk)는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몇 번의 반전이 있었다 한다. 창업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처음에 그는 네스케이프라는 회사에 입사하기를 희망했다. 스탠포드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는 네스케이프에 입사하기로 하고 입사원서를 냈지만 그곳에서 그는 거절을 당해야 했다. 거절당해 본 자만이 창조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절당한 인생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누구에게 거절당해본 사람은 거절의 의미를 안다. 역사로부터, 현실로부터 거절당해 본 자는 그 거절의 의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머스크도 거절당했음으로 지금의 테슬라 모터스(Tesla Motors)와 솔라시티(Solar City)와 스페이스 엑스(Space X)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로부터 인정받고 수용되었던 이들은 창조를 모른다. 고통 없이 인생을 살아본 자들에게 왜 창조가 필요할 것인가?

창조는 거절당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이다. 현실로부터 거절당해 본 자들에게는 스스로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의지와 판단이 들어선다.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고난이 유익이라는 생각은 그때부터 했다. 내가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결정적 판단을 하고부터 고난의 의미를 알았다. 죽음의 길목에서 길을 찾아 나서면서 살기 위해서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 잡스도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라고 했다. 다르지 않으면 즉 차별화된 삶을 살지 않으면 아무런 존재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 달라야 한다. 다름은 곧 창조적 삶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창조의 영성이며 삶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창조적인 삶이다.

야곱도 창조적 삶으로 자신을 속이던 외삼촌 라반의 술수를 극복하였으며, 요셉도 마찬가지로 창조적 경제관을 갖고 있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그 꿈의 의미를 창조적 경제라는 틀 안에서 바라본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읽었고, 그 변화의 핵심은 곧 경제의 위기이며, 그 위기가 곧 기회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위기 안에 기회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다음은 무조건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다르게 그 위기를 기회로 해석하면 된다.

흉년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의 변화를 조금만 이해하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흉년의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붙잡는 창조적 해석이다. 그리고 그 창조적 경제를 통한 창조적 독점을 이룩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한 창조적 독점에 대한 안목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온다. 아니 똑같은 위기가 온다. 위기는 모두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동일한 위기를 다르게 생각함으로 자신에게 축복과 은총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다. 요셉과 야곱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기와 문제를 기회의 시작으로 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축복의 상징이 된 것이다.

만약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이 주기로 했던 임금을 그대로 주었더라면 성공한 야곱은 없었을 것이다. 야곱이 일가를 이루고 축복의 상징이 된 것은 외삼촌 라반의 임금 체불 때문이었다. 삼촌의 착복과 배반이 없었다면 야곱도 없다. 라반의 배반과 얄팍한 술수는 야곱에게 새로운 창조적 깨달음을 허락해 주었다. 절박했음으로 아니 그 절박함을 넘어 감히 인간에 대하여 이럴 수 없다는 오기와 집념으로, 그는 다른 사람은 꿈에도 알 수 없는 창조적 비밀을 알아냈던 것이다. 얼룩무늬 양과 염소를 태어나게 하는 비밀이다. 그것이 곧 창조적 비밀이었던 것이다. 누구도 아니 오늘날의 어떤 유전학자도 그것을 모른다. 그 돌연변이의 창조성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점박이 양과 염소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 나도 그 비밀한 창조적 생각을 알고 싶다.

요셉도 그랬다. 아버지처럼 그도 아버지의 닮은꼴이다. 감옥에 갇힌 신세로 살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의 꿈에 대한 해몽을 해보라는 것이다. 파리해진 소들과 말라버린 쭉정이의 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꿈은 경제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는 왕이다. 왕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은 백성을 살려내는 것이다. 바로의 꿈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성공한 사람은 없다. 최고의 성공은 가장 낮은 곳에서 절박해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그래야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창조성이 서서히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과 요셉에게서 나는 창조적인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본다.

 

경쟁은 싫다

한마디로 창조적 독점은 경쟁을 용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블루오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경쟁하지 않는 창조적 독점의 상태를 말한다. 누구든 블루오션에서 물고기를 잡고 싶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마는 그럼에도 블루오션은 이 세상에 널려있고 많은 사례가 있다. 문제는 블루오션이란 경쟁하지 않는 독점적 상태를 말하므로 경쟁하는 인생을 살지 않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쟁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애급을 떠날 용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블루오션을 살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애급도 떠나지 않으려 한다. 관성이 지배하는 삶이 더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용기 없는 사람은 결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더 먼 바다로 떠날 용기가 있어야 블루오션의 바다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과 친구가 되고 익숙함을 멀리하며 스스로 떠나려는 길 위의 삶에 대한 용기가 있는 자만이 경쟁하지 않는 블루오션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나는 광야를 좋아한다. 특히 몽골의 고비사막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곳에 가면 언제나 특별한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비사막에 갈 때마다 나는 다시 길을 찾고 길 위의 삶을 결단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나서는 길 위의 인생은 언제나 설레기에 나는 광야를 사랑한다. 내 인생은 광야의 인생이었다. 길을 만들고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먹고 자는 나그네 같은 고단함이 이제는 소중한 동지이며 그것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주민 나그네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나도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광야유목민나그네라는 말을 사랑한다.

광야에 나가야 경쟁이 없다. 광야는 블루오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곳에 언제나 외로운 고독이 있음은 당연하다. 블루오션은 그래서 외로운 인생이다. 친구도 동지도 아니 적도 없는 그 홀로됨의 자리가 광야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함은 그래서 소중한 영적 훈련장이 된다.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광야의 목회를 해보라고 그렇게나 열심히 말을 하지만 정작 광야로 나오는 이들은 없다. 광야를 두려워해서다. 광야에 가면 죽는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직 단한번의 인생은 광야에서 살아야 제 맛이다. 멋진 광야의 모습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에게 광야에 대한 설명은 제한적이다. 때로 광야를 설명하자면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 대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광야가 참 멋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면 빈정대는 말투로 어떻게 광야가 아름다울 수 있느냐며 어깃장을 놓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광야의 맛을 모른다. 광야는 경쟁하지 않으려는 길 위의 인생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멋진 여행 터이기 때문이다.

 

치킨 게임과 무한 경쟁의 시대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치킨 게임에 중독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인가? 목회는 더욱 심각하다. 한 사람의 성공적 목회자가 나오려면 수많은 목회자들의 눈물과 한숨이 따라야 한다. 한정된 교인들을 놓고 경쟁적 목회를 하자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옆 교회가 성장한다면 우리 교회는 없어져야 한다. 아니 우리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옆 교회를 죽여야 한다.

치킨 게임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되는 무한 경쟁의 게임이다. 누가 죽어야 하는가? 내가 죽지 않으려면 그가 죽어야 한다. 만약 그가 살려면 나는 죽어야 한다. 그런 게임의 법칙을 누가 만들었는가? 세상은 결코 모든 이들을 승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오직 승자는 한명이다. 모두가 그 한명의 승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모두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공생의 게임은 없는가? 치킨 게임이 아닌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특별한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치킨 게임이 싫다. 오직 한명만 살아남는 그 천박한 무한경쟁은 싫다.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고 아무도 하지 않는 새로운 창조적 독점의 목회를 꿈꾸었다. 힘들지만 그런 인생을 살아 경쟁하지 않는 목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이 나섬의 목회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지금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다. 치킨 게임의 경쟁의 목회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참 좋다. 누구든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용기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정관념과 익숙함과 관성과 선입관과 우리를 지배하는 상식의 틀을 벗어던지고 떠나야 한다. 고독한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 홀로 된 고독한 유목민처럼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말을 타고 아무도 없는 먼 바다에서 홀로 고기를 잡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블루오션과 창조적 독점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은 어떤 기업인가? 구글과 페이스북과 애플과 마이크로 소프트와 아마존과 알리바마 같은 기업들이다. 에어 비앤비와 우버와 같은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이 창조적 독점을 이룬 기업들이다. 그 기업을 일으켜 세운 이들도 그렇다. 그들은 창조적 독점을 이룬 독보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창업 스토리를 공부하면서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엄청난 기업을 일군 이들도 고난을 당해야 했다. 실패도 절망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그 고난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런 고난이 좋아서 창업을 하고 그런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블루오션의 기업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물고기를 혼자 잡는 기쁨은 누려본 자만이 안다.

우리 어머니는 가을이면 온통 도토리를 줍는 일에 시간을 보내신다. 우리 어머니 사시는 집 앞에 도토리 밭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다른 이들에 비하여 많은 도토리를 줍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만 아는 도토리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숨겨놓은 것처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나무만 골라 도토리를 주우니 다른 이들의 수확량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어머니는 자신만의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 줍는 기쁨과 즐거움을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조용히 누구에게도 눈치 채지 않도록 홀로 많은 도토리를 줍는 그 즐거움은 누구와도 비길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 많아 혼자서 들고 올 수 없을 만큼 많은 수확을 거둔 날은 그 기쁨이 두 배 세 배가 된다고 하신다. 다른 이들은 작은 도토리나무 주변에서 서로 줍겠다고 경쟁을 할 때에 어머니는 당신만의 도토리나무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도토리를 줍는다. 홀로 줍는다.

경쟁 없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도토리나무를 찾아야 한다. 다른 이들은 찾을 수 없는 나만의 거대한 도토리나무를 찾아야 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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