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몽골1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2) > 노마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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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1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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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마자 곽 목사님이 내게 하신 말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곽 목사님은 자신이 미국의 플러에서 선교학을 전공한 신학자이지만 소망교회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선교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선교의 기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주민 선교다. 그리고는 나에게 구로공단에 들어갈 용의가 없느냐고 물으셨다. 그때에 받은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제안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던 목회에 대한 철학과 원칙, 즉 최초의 목회를 하고 싶다는 것과 약자를 돕는 목회여야 한다는 두 가지가 어떻게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싶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동의했다. 이건 기도해 보나마나한 일이라 생각했다.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에는 기독교인들의 비겁하고 이중적인 속내가 들어있다고 생각한 나였으므로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들어간 곳이 구로공단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나그네 목회가 시작 되었다. 그런데 나그네 목회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가장 밑바닥 목회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해도 좋은가 말이다. 나는 철학을 갖고 선택한 목회다. 밀려서 억지로 끌려간 목회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 결단한 목회다. 물론 그렇게 자발적으로 내려간 목회에 대하여 인정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목회 또한 존중해 주는 목회문화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권위적인 큰 목사님들께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하지만 굴욕적인 목회 경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기 목사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 공동체는 늘 재정적으로 쪼들렸으니 자비량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일환으로 치즈 떡볶이를 판매한 적이 있는데, 공장에서 포장된 떡볶이를 가져다가 교회마다 다니면서 설교도 하고 예배 후에 떡볶이 떡을 팔곤 했었다. 그 동기 목사 교회에서는 금요일 심야기도회 때 설교를 하고 떡볶이를 팔게 되었다. 예배를 마치고 떡볶이를 판매한 후 담임 목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동기 목사가 부목사로부터 전달받은 떡볶이 값 봉투를 내게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마치 거지에게 동냥 몇 푼을 던져주듯이 가져가!”라면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내는 운전을 하다가 나의 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내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더니 가만히 내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내 맘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아내가 참 고마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동기 목사를 만나지 않는다. 아직도 내게 돈다발을 던지며 비굴함을 강요하듯 하던 그 말투가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굴종과 비굴함의 삶을 살았다. 돈이 없었으므로 때론 거지로, 때론 김치를 훔친 도둑 목사로, 거추장스러운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쩌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선택에 대하여 후회함이 없으니 이건 내 운명이다. 이건 내게 주신 특별한 은총의 목회다.

 

가난은 불행이거나 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불편할 뿐이다. 작은 교회를 담임하든 나 같은 비주류 목회자로 살든 이 세상의 모든 목회는 소중하다. 큰 목사와 작은 목사의 구별은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기준으로 만든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회와 삶에 대한 자존감과 철학이다. 신념과 소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삶과 목회는 그 자체가 보석 같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나의 삶과 목회에 대하여 후회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게 감사와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살아있는 광야의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구로공단과 성수공단 그리고 강변의 지하실과 광장동 골목 끝은 지금의 나섬과 몽골학교에 이르는 광야의 순간들이었지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만났고 하늘의 뜻을 찾았으며 인간이 진정 살아있다는 것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1987년 목사 안수 후 30년이 지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마치 잊을 수 없는 영화 한편을 그리듯 그때를 떠올리고 있다. 너무도 생생하고 소중했던 시간들이었음으로 나는 그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기억한다.

 

신명기 8:2~10 8: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8: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8:4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8:5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8:6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8: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8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8:9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8:10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잊을 수 없는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다. 그들에게 광야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결코 그 광야의 날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했다. 광야에서 먹었던 그 메추라기와 만나의 기억들을 말이다. 마라와 므리바의 샘물은 그들과 모세 자신의 운명을 가른 딜레마의 사건이었지만 그것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세의 초연함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체험은 그 민족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런 광야다. 가난하고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너무도 특별했음으로 그 광야는 유대인 모두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뼈 속까지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하는 조건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나그네 목회와 그 시간들은 마치 40년 히브리 백성의 체험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 순간순간의 일들과 얼굴들 그리고 그 순간의 눈물과 분노가 함께 떠오른다. 그때의 절망과 아픔이 떠올라 때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 모든 순간은 은혜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은혜다. 잊지 말아야 할 은혜다. 아픔이 은혜가 되는 그 찰나가 있어 우리 삶은 아직 살만한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의 아픈 기억들조차 이제는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것밖에 없다.

아픔도 기쁨도 은혜의 자리에서 만나면 소중한 인생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매우 중요한 내 삶의 흔적들이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그런 고백 위에서 씌어졌다.

 

특별히 내가 몽골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가난한데다 눈의 시력이 많이 떨어졌을 때 몽골이라는 나라를 만나면서 이게 무슨 징조인가를 속으로 물었었다. 더 이상 지하 동굴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을 때에 나는 몽골을 만났다. 어쩌면 그 때 몽골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그네 섬김의 자리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기이하게도 나는 몽골이라는 나라를 어릴 때부터 매우 동경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칭기즈칸의 위대한 인생과 제국의 역사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큰 도전을 받았었다. 한 마디로 몽골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역사적 만남이었다. 몽골 사람 개인과의 만남이었지만 그것은 역사와 국가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는 하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만남이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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